오피니언 중앙 시평

대통령의 백미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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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난해 9월 미국 워싱턴의 한 호텔, 방문을 여니 복도에 신문이 떨어져 있었다. 소득이 줄고 빈곤은 늘면서 '빈곤율'이 이태째 오르고 있다는 미국 센서스 보고서가 워싱턴 포스트의 1면 기사로 실렸다. 빈곤율은 중위 소득의 40% 이하를 가리키는데, 2002년 미국 가계의 12.1%가 여기에 속했다. 중위 소득은 4만2409달러고, 4인 기준으로 1만8244달러가 안 되면 빈곤 가계였다.

*** 3가구 중 1가구 적자에 허덕

이 빈곤율에 상응하는 우리 지표가 '상대 빈곤율'이다. 2002년도 도시가계의 이 비율이 20.1%이고, 중위 소득은 2200만원이었다. 양국 수치의 직접 비교는 무리가 따르지만 그럼에도 소득 석차대로 101명을 나란히 세울 때 51등의 소득은 한국이 미국의 절반이 못 되나 꼴찌 그룹의 인원은 두배에 가깝다는 말이다. 아무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중 빈곤 순위는 터키.멕시코.슬로바키아 등에 이어 7위이나, 빈곤율은 멕시코 다음으로 2위니 정말 낯뜨거운 기록이다.

그리고 소득과 기초생활비를 비교하는 '절대 빈곤율'이 있다. 2002년 4인 가족의 월소득이 기초생활비 99만원(연간 1180만원)을 밑도는 절대 빈곤 가구가 전체의 16.7%에 이르렀다. 외부 도움 없이는 살아가지-살아남지-못할 '기아 선하'의 가정이 도시가계 여섯 중 하나라는 뜻이다. 빈곤의 주범은 전통적으로 실업이 꼽혔다. 그러나 근자에는 근로 빈곤층(working poor)이 악역을 대신하고 있다. 한 연구 보고에 따르면 일자리를 가지고 일을 하면서도 최저 생계비조차 못 버는 근로 빈곤층이 1996년엔 전체 가구의 2.9% 정도였으나 2000년에는 7.1%로 왕창 불어났다.

소득분배론 교재에 늑대점(wolf point)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늑대 출몰 지역이라는 뜻이 아니고, 소득이 생계비 지출과 같아지는 '빈곤 분기점'을 가리킨다. 소득이 이 아래로 떨어지면 굶거나, 빌리거나, 훔치는 도리밖에 없으니 늑대보다 무서운 지표렷다. 첫째 방법은 권고하기 어렵고 셋째 방법도 위험하기 짝이 없으니, 신용불량자 걱정이 앞서지만 그래도 둘째 방법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올 1분기 가처분소득이 소비 지출보다 적은-늑대가 어슬렁대는-가구가 전체의 31.9%나 됐다. 이중에는 저축이나 재산을 헐어 살아가는 다행한 가계도 있겠으나 전국 1431만가구 가운데 456만가구가 '적자로' 버티는 꼴이다.

빈곤에 감초는 단연 불평등이다. 최상위 20%의 가계 소득과 최하위 20%를 비교한 5분위 배율은 올 1분기 7.75였다. 소득 불평등 정도를 재는 지니계수도 지난해 0.306에 이르렀다. OECD 회원국 가운데 멕시코와 미국 다음이니, 다시 말해 가장 빈곤한 불평등과 가장 부유한 불평등 다음이니 아주 제멋대로 가는 기록이다. 현재의 불평등 상태도 예사롭지 않지만 소득이 늘어나면서 소득 격차가 벌어지는 현상은 더더욱 예사롭지 않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못 참는다. 그 야유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든, 혁명이 빈곤에서 폭발하지 않고 불평등에서 폭발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97년의 외환위기를 고비로 빈곤과 불평등이 심해진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전천후 변명이 돼서는 안 된다. 환란 극복 선언부터 5년, 국제통화기금(IMF) 졸업 선언부터 3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빈곤과 불평등 추세가 여전하다면 위기 극복이나 졸업 따위의 자부가 턱도 없거나 그 뒤의 대응이 엉망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정권이 바뀌고 한해가 흘렀으나 아직은 분발의 흔적도, 개선의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 백미러 보며 전진한다고 착각?

워싱턴 포스트는 1면 기사 외에 또 한면을 해설로 채웠다. 경기가 깨어난다면서-절대로 위기가 아니라면서-스콧 매클렐런 백악관 대변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구하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대통령은 만족하지 않습니다"라고 국민의 심금을 울리는 논평을 냈다. 이에 토머스 대슐 민주당 원내총무는 부시 행정부의 한심한 경제 성적표를 들이대면서-위기를 제대로 보라면서-경고 신호를 보냈다. "경제는 계속 뒤로 미끄러지는데 대통령은 전진만 한다고 외치니. 그가 백미러(rearview mirror)를 들여다 보고 있다고 누가 좀 전해주시오."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