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세자 12명, 이래서 왕이 못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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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 계승자이면서도 왕이 못된 조선의 세자들이 27명이나 된다. 이 가운데 살해되거나 폐위된 세자가 5명, 병사한 세자가 6명, 왕조 멸망을 겪은 세자도 있다.

최근 성균관대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 함규진씨가 출간한 ‘왕이 못된 세자들’(김영사)은 왕위에 오르지 못한 비운의 세자들의 삶을 담고 있다.

조선 최초의 세자 의안대군 이방석은 17세의 나이에 이복형의 칼에 죽었다.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 적장자도 아니고 공로도 없는 어린이를 세자로 책봉한 태조의 결정이 골육상쟁을 몰고 왔다.

양녕대군은 자신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동생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그는 일부러 미친 척하며 일탈 행동을 일삼았고 결국 세자 자리에서 폐위됐다. 후에 세종대왕이 된 충녕대군은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끈다. 양녕대군의 일화는 미담으로 남아있다.

왕의 아들이기 이전에 권력의 2인자라는 사실은 종종 필연적인 비극을 불러왔다. 인조는 세자를 노골적으로 경계했고 태종과 영조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세자에게 양위하겠다는 거짓 선언을 거듭하기도 했다. 왕이 늙고 병에 걸려 신하들이 ‘떠오르는 태양’인 세자 쪽으로 잰걸음을 칠 때,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 왕의 권위가 흔들릴 때, 왕은 세자에게 극도의 위협을 느꼈다.

세자 27명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산 사람은 소현세자다. 청에서 8년 간 볼모살이 끝에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냉혹한 아버지의 경계와 의심 속에 귀국 뒤 두 달 만에 죽었다.

영조도 아들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했다. 영조가 세자를 뒤주에 가둔 ‘뒤주사건’은 유명하다. 그러나 세자를 실제로 뒤주에 가둔 것은 잠깐이었고 사도세자는 세자의 자리가 주는 압박감을 버티지 못하는 기질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다는 주장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 영조는 자주 양위 선언을 정치적 카드로 활용했는데 그것이 세자를 심리적 공황상태로 몰아 이상행동을 일삼게 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첫 세자 이방석이 그랬듯 조선 최후의 세자도 왕위에 못 올랐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열한 살에 강제로 일본에 보내져 일본 황족과 결혼했다. 광복 후 한국행을 원했지만 새로 수립된 정부의 반대로 돌아오지 못하다 1963년 57년 만에 조국 땅을 밟게 됐다. 조선왕조의 세자이면서 일본 황실의 일원이었던 그의 모호한 정체성은 비극의 원인이자 결정체였다.

디지털뉴스 jdn@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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