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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눈] 우리사회와 테레사수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참으로 어지러운 세상이다.

끔찍하고 참혹한 사건.사고가 겹쳐 신문 사회면 보기가 두려울 지경이다.

2천만원을 요구하던 초등학교 2년생 나리양의 유괴범은 열흘이 넘도록 모든 부모들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방송을 통해 협박전화의 녹음내용을 반복해 들을 때마다 악마의 목소리가 바로 저런 게 아닐까 싶어 몸서리쳐진다.

인간이 언제부터 이렇게 뻔뻔스럽고 표독스러워졌을까 싶을 정도다.

여고생의 보복출산도 참으로 기막힌 사건이다.

오직 임신시킨 범인을 찾을 목적으로 아이를 낳도록 강요했다니 새로 태어난 생명에 대한 얼마나 큰 모독인가.

또 어른들이 조그만 갈등에도 살인을 일삼기 때문인지 초등생까지 살인을 저지르는 세상이 돼 버렸다.

거기에다 토막을 내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흉악해졌으니 정말 큰일이다.

같은 직장에 다니던 여자를 성폭행한 후 토막살해해서는 쓰레기로 버리고, 아내의 정부 (情夫) 를 몸통 따로 머리 따로 불지르는 등 도대체 인성 (人性) 의 황폐화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지 두렵기 짝이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제는 시민들조차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잇따라 토막시체가 나와도 별로 놀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너무 자주 참사 (慘死) 를 겪다 보니 어지간히 무감각.무신경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다.

70년대 중반 신문사에 갓 입사했을 때는 연탄가스나 교통사고, 심지어 자살로 한두명이 숨지기만 해도 기사는 물론 죽은 사람의 사진까지 신문에 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지금은 사고가 흔해 인명 (人命) 인플레가 됐기 때문인지 서너명의 사망사고는 1단기사도 안된다.

나 스스로도 요즘은 웬만한 사고쯤은 관심조차 안갖게 됐으니 그만큼 둔감해지고 메말랐다는 증거일 것이다.

사회뿐만 아니라 정치.경제 할 것 없이 우리 의식이 총체적으로 이렇게 피폐해진 것은 무엇보다 쿠데타에 따른 가치관의 붕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잇따른 하극상 문화가 부정한 힘으로 기존 정치질서를 무너뜨린데다 성장위주의 경제바람에 양산 (量産) 된 뿌리 없는 졸부들의 기회주의적 행태가 시민들의 최소한의 양심마저 마비시켜 버린 것이다.

거기에다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과정이나 절차의 정당성을 무시한 채 결과만 중시하는 사회풍토가 이를 부채질한 것이 아닐까.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떨어진 정치인들이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딴소리를 하고 다니는 것이나 대법관까지 지내고 '법대로' 라는 별명을 지닌 이회창 (李會昌) 대표가 형확정 몇달 안된 두 전직대통령의 사면을 서둘러 건의한 것도 바로 가치관이 붕괴하고 원칙이 상실됐음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평생 야당생활을 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정보정치의 가장 큰 피해자임을 내세워 온 국민회의 김대중 (金大中) 총재가 대선을 앞두고 중앙정보부 전직간부를 영입하느라 애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 뇌물 등 파렴치한 범죄로 교도소에 갔다온 사람들이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활개치고 다니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같은 몰염치.부도덕.무질서 속에서 살다 보니 희생과 헌신.봉사로 살다 간 테레사 수녀의 타계소식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평생을 가난하거나 병들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살았다더니 두 손을 입술에 모으고 있는 모습이 정말 갓난애처럼 순진무구하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표정과 눈빛만 봐도 내 마음이 저절로 가라앉는 것 같다.

깊은 주름살 하나하나도 모두 예사롭게 보이지 않고 어느 구석에서도 욕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저것이 바로 살아 있는 천사의 모습인가.

가만히 테레사 수녀의 사진을 들여다보노라니 우울하던 마음이 왠지 모르게 밝아지고 맑아졌다.

그리고 어둡고 더러운 우리 사회에도 정의와 진리를 위해 헌신하는 지도자가 단 몇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더욱 절실해졌다.

권 일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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