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 자전거 배우던 곳" 여의도 광장이 사라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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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여의도광장은 참 조용히 퇴장한다.

보존여부를 놓고 상당한 논란이 일었던 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

느닷없이 총독부 건물 얘기를 꺼내는 것이 의아하게 생각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 둘은 아픈 우리 근현대사의 상징물이라는 점에서 비교의 대상이 될 만하다.

하나는 일제 36년의 잔재, 다른 하나는 30여년 군사정권의 유물. 이곳의 첫 이름은 5.16광장이었다.

90년까지 이어진 군사 퍼레이드를 떠올리면 이미지는 더욱 생생하게 살아난다.

체격이 뛰어난 군인들과 최신예 병기 - .

이름을 여의도광장으로 바꾼 전두환대통령 재임기간에도 대규모 행사는 끊이지 않았다.

'국풍 81' 로 대표되는 전시성 행사가 줄을 이었고 북한 전투기가 넘어오면 환영대회, 우리 여객기가 떨어지면 규탄대회를 열었다.

이는 광장의 탄생과정과 연관이 있다.

71년 2월에 시작한 광장 조성공사는 박정희대통령이 67년부터 야심적으로 추진한 여의도개발의 핵심이었다.

서울시의 당초 구상은 나무와 잔디가 심어진 휴식공간으로 꾸미는 것이었으나 박대통령은 이를 일축했다.

아스팔트가 깔린 허허벌판을 주문했던 것이다.

7개월여만에 길이 1천3백20m, 폭 2백여m의 거대한 광장이 여의도 한복판에 탄생했다.

축구장 20개를 합한 것보다도 넓었다.

유사시엔 활주로로 쓴다는 계획도 들어 있었다.

광장은 군사정부의 마지막 통치자 노태우대통령에게도 큰 선물을 안겼다.

부활된 직선제 선거의 벼랑 끝에 서 있던 87년 당시 노태우후보는 이곳 유세에서 1백만 청중을 동원한 이후 여세를 몰아갔다.

여의도광장을 "그냥 둬서는 안된다" 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군사정부에 종지부를 찍을 무렵인 92년말. 고층 빌딩을 세운다, 지하공간을 만든다는 등 개발의 모양새를 놓고 논란이 계속됐지만 '광장 보존론' 은 별로 들리지 않았다.

광장은 오랫동안 힘있는 사람들 편이었다.

정부와 정치인들은 세를 과시하는 무대로 십분 활용했다.

광장 공원화를 주도하고 있는 조순 서울시장이 95년 6월 시장 후보등록을 마치고 제일 처음 찾아 한표를 호소한, 바로 그곳도 여기였다.

하지만 이제 정치인들에게 이 땅은 그리 쓸모없는 터가 되고 말았다.

대규모 선거유세의 후유증이 심각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관심권에서 멀어졌던 것이다.

대신 농민과 전문.비전문직 노동자들이 광장의 새 세력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이해관계가 얽힐 때마다 이곳으로 몰려왔다.

올해만 해도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는 대대적인 집회가 벽두를 장식했고, 얼마전엔 고교 내신제도 개선을 촉구하는 외국어고 학부모들이 모여들었다.

광장을 관리하는 영등포구청 김동주 (47) 계장은 "요즘엔 공식 행사보다 집회가 훨씬 잦다" 고 전한다.

이 와중에서 묵묵히 광장을 지켜온 이는 청소년들이다.

아이들은 주말이면 답답한 교실을 벗어나 트인 광장에서 자전거와 롤러 스케이트를 타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지하철 5호선 여의도역에서 여의도광장으로 이어지는 3백여의 '여의도 국회 앞 지하보도' 벽에는 하트 그림이 가득하다.

한쪽 옆엔 가수.영화배우의 이름이, 다른 한쪽엔 평범한 이름이 적혀 있다.

광장가는 길의 낙서 - . 막상 터가 사라지고 나면 아이들은 이 매머드 도시 어느 곳에서 머물 수 있을까. "고3.고1인 우리 아이들은 여기서 세발 자전거부터 배웠다" 는 주부 최승은 (46) 씨는 "이 추억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고 심경을 밝힌다. 소련의 붉은광장, 중국의 천안문광장, 북한의 김일성광장 등을 염두에 두고 그려진 여의도광장은 사라진다.

지금에 박대통령 재평가 작업이 활발히 진행 중인 것은 아이러니다.

너무 쉽게 땅을 갈아엎는 건 아닌지. 군사정부의 기억이야 똑같은 깊이로 파낸 한강바닥과 칼로 자른 듯 만들어 놓은 둔치에서 찾는다 치자. 그러나 '앞으로 다시는 만들 수 없을' 광활한 공터의 추억을 어디서 더듬어야 할까. 강주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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