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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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정오 무렵, 나는 '털보네와 짱구네 식당' 으로 식사를 하러갔다.

집에서 뭔가를 만들어 먹을까 잠시 망설이기도 했지만, 기분이 말이 아니라서인지 아무 것도 먹고 싶은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기분전환도 할 겸 일부러 비 내리는 세상으로 나선 것이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을때 선택하는 것 - 그것이 나에게는 외식이었던 것이다.

식당에는 두 테이블에만 손님이 앉아 있었고, 홀에는 짱구씨가 나와 있었다.

평소에는 짱구씨가 주방 일을 권장하고 털보씨가 서빙을 담당하는데 어쩐 일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자리를 잡고 앉으며 짱구씨에게 물었다.

"무슨 변화라도 생긴 건가요?"

"변화라뇨?"

물컵을 내 앞에다 내려놓으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짱구씨는 되물었다.

"설마, 털보씨가 여길 그만둔 건 아니겠죠?"

"아, 난 또! 그 친군 지금 시장에 갔어요. 아침부터 호박잎에 쌈을 싸먹고 싶다는 타령을 해대더니,점심시간 직전에 기어이 시장엘 다녀오겠다고 나갔지 뭡니까. 지금 주방에서는 호박잎을 데칠 물이 펄펄 끓고 있는 걸요. "

감색 에이프런에 부착된 주머니에다 한손을 찌르고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말세 종교에 빠진 아내 때문에 전재산을 날리고, 이십년 넘게 봉직하던 공무원직까지 포기한 그는 무척이나 소심하면서도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라서 식당이 문을 열던 초기만해도 얼굴에 짙은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을 회복한 때문인지 표정이 많이 밝아져 있었다.

전재산을 탕진한 아내가 산중의 기도원으로 잠적해버리고 두아이들 교육까지 도맡게 되긴 했지만, 그나마 길거리로 나앉지 않고 이렇게 안정을 되찾게 된 걸 그는 역설적이게도 '진심으로 하느님에게 감사' 하고 있었다.

요컨대 진정한 감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이고 이 선생, 정말 때맞춰 잘 오셨네요!"

내가 주문한 김치찌개 백반이 나온 직후, 뭔지 모를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오른듯한 표정으로 털보씨가 나타났다.

보기 좋게 수염을 기른 그는 덩치가 아주 크고 다소 호걸스럽게 생긴 인물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당 동업을 권유, 생계가 막막해진 짱구씨를 지금껏 도와 주는 것만 보더라도 그의 품성이 얼마나 넉넉한지는 족히 짐작할 만했다.

언제였던가, 식당개업에 드는 비용 일체를 털보씨가 충당했는데도 이익 배당은 50대50으로 한다는 얘기를 나는 짱구씨로부터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때, 그들이 자기 세대의 입맛을 중시하는 식당을 경영한다고 해서가 아니라, 아직도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남아 있구나 하는 사실을 확인하며 나는 물큰한 감동에 사로잡히지 않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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