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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비엔날레]카셀·베니스에 못지 않은 현대미술의 실험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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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글쎄요. 광주라는 이미지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요. "

제2회 광주 비엔날레 본전시를 둘러본 프랑스의 유력 미술전문지 '아르 프레스' 의 편집장 카트린느 미예는 "만일 광주란 말을 가린채 이 비엔날레를 봤다면 인상이 어땠겠느냐" 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녀의 답변에는 좋은 뜻도 나쁜 뜻도 있다.

우선 나쁜 쪽은 광주에서 열리는 비엔날레로서 광주의 색깔, 나아가 한국적인 무엇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 좋은 쪽은 광주가 세계 각곳에서 열리는 비엔날레의 하나로서 대등한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그녀와 동행한 영국 옥스퍼드 현대미술관의 케리 브라우어관장은 이번 비엔날레를 가리켜 "뛰어난 비엔날레다.

카셀이나 베니스에 못지 않다" 고 말했다.

비엔날레로서 뛰어나다는 것은 무엇인가.

2년전 국내의 많은 반대와 심지어 국외에서의 우려속에 시작된 광주 비엔날레가 2회째를 맞아 창설 당시의 목표이기도 한 현대미술을 다루는 실험장의 하나로서 세계의 유력 미술인들의 머리속에 기억되기 시작한 것을 뜻한다.

이번 테마는 '지도 새로 그리기 (Unmapping the Earth)' 였지만 실제론 세계 문화지도 위에 광주를 올려놓는 (mapping) 성과를 올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올 비엔날레가 좋은 평가를 받은데는 다분히 해럴드 제만이란 탁월한 전시기획자 (커미셔너) 의 능력과 활동에 힘입은 바 크다.

스위스 태생으로 리용 비엔날레의 기획자이기도 한 그는 '지구의 여백' 이란 테마 중 소주제 '속도 - 물' 의 구성을 맡았다.

전시장에 처음 들어서면 1941년 미해군이 사용했던 잠수 헬멧을 마주치게 된다.

60년대말 젊은 백남준과 함께 플럭서스 멤버로 활동했던 벤 보티에의 작품이다.

그는 헬멧 양쪽에 흰 종이에 검은 글씨로 '천천히 가기 (Slow down)' '나비는 하루를 살고 코끼리는 100살을 산다.

어느 것이 더 빠른가?' 라고 적은 패널을 걸어놓고 있다.

속도의 냄새를 어지간히 맡게 하는 도입부인데 제만은 계속해서 몰아쳐 현대 비디오아트의 탁월한 연출가인 빌 비올라를 끌어들여 천천히 걸어오는 사람의 몸 위로 물이 떨어지고 불이 붙는 모습을 웅장한 비디오 작업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한국말을 배우는 긴 과정을 작품으로 만든 라이너 가날이나 수중 촬영한 자신의 모습을 비디오로 편집한 피필로티 리스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재즈 편곡해 들려주는 스탠 더글라스등의 작업을 통해 '속도란 무엇인가' 라는 것을 충분히 음미하게 해주고 있다.

또 그는 현대의 '빠른 시간' 에 대한 역설로서 민들레 꽃잎을 따서 가루를 만들고 그것을 조용히 바닥에 뿌려놓은 볼프강 라이프의 시적인 작품 '민들레 꽃가루' 를 보여준다.

그리고 남자의 성기에서 나오는 힘찬 오줌 줄기를 사진으로 찍어 마치 우주의 안드로메다 성운처럼 정지된 모습으로 표현한 잉게보르그 뤼셔의 작품 '날으는 물' 을 통해 속도의 여러가지 모습을 정리하고 있다.

속도의 역동성에서 정적인 모습까지 보여준 그는 이번 비엔날레에서 최고란 평가를 받았다.

작가들의 선택 뿐아니라 전시장 평면을 여러 개의 칸으로 나눠, 천천히 걸으면서 보고 느끼며 일부는 직접 사용해보면서 속도의 의미를 관람객 스스로가 체험케해 그런 평가를 이끌어낸 것이다.

두번째 '생성 - 흙' 소주제 전시장은 많은 칸막이로 나뉘어진 '속도' 전과 달리 넓은 공간에 많은 것을 뿌려놓음으로써 생성의 다이내믹한 모습을 전하고 있다.

이번 비엔날레의 특징 중 하나는, 물론 그것이 실험정신의 일부이겠지만 시각물 이외에 소리.냄새.살아있는 것까지 동원한데 있다.

파리에서 활동중인 젊은 한국미술인 구정아씨는 나프탈렌이 공기 중에서 녹으면서 나는 냄새를 가지고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의미, 즉 자신을 사회 속에 녹여 남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뚝심있는 현대미술가 황용핑은 고대중국의 황제가 행차하면서 탔을 것같은 땟목 비슷한 가마를 만들어 보여주고 있는데 가마 안에는 살아있는 구렁이 20마리가 들어있다.

구렁이는 황제의 상징인 용을 의미한다고. 제3전시장에서 '혼성 - 나무' 란 소주제를 다룬 리처드 코살렉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장) 은 자신이 활동하는 로스앤젤레스가 인종의 복합전시장인 것처럼 제3세계의 작가들을 많이 끌어들인게 특징.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강익중씨는 물론 중국전통사회가 현대소비문화에 의해 파괴되는 모습을 은유한 작업을 낸 중국의 유망주 첸젠의 설치작업, 그리고 쿠바작가로서 그림속의 내용이 그림밖으로 이어져 중첩되는 것을 회화형식으로 표현한 아이메이 가르시아등을 소개하고 있다.

또 태국의 젊은 작가인 나빈 라완차이쿨은 전시장 안에 6평 규모의 종이박스 집을 만들어놓고 애틀랜타와 치앙마이.광주의 어린이들이 함께 만든 소품들로 치장해놓아 소박한 의미에서의 참여예술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주고 있다 '권력 - 금속' 부분에서는 러시아작가 에릭 불라토프가 전통회화의 방식으로 러시아의 현재를 그린 작업들이 눈길을 끌며 광주출신의 젊은 조각가 손봉채씨가 바퀴가 앞뒤로 돌아가는 일륜 자전거 30여대를 천장에 매달아 권력을 풍자한 것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공간 - 불' 부분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된 화제의 전시. 뉴욕에서 활동하는 박경씨가 구성한 이 부분은 건축사진.건축모형물.도면등으로 꾸며져 있다.

아무리 현대미술이지만 '건축사진만 걸어놓은 것이 미술이냐' 는 반응이 많다.

하지만 '아주 새롭고 신선한 발상이다' 란 외국 평론가의 평도 있다.

서울.베이징.타이.베이루트.사라예보등 세계 22개 도시의 주요한 도시건축이나 재개발 과정을 수백개의 패널로 소개한 이 전시는 어찌보면 지루하다.

그러나 조금 찬찬히 들여다보면, 오늘날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정치.경제.의식을 다루는 것이 예술이라면 도시 이상의 좋은 재료가 없을 것이란 점을 쉽게 느끼게 된다.

전시장 밖을 나서면 비엔날레 행사장 맞은 편에는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수려한 무등산 줄기를 조금씩 가리며 올라가고 있는 아파트를 보면 박경씨가 말하려는 '공간이 우리를 어떻게 감싸고 있는가' 를 더욱 실감하게 된다.

올해 비엔날레 본전시는 출품작가와 내용면에서 수준급이란 평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지구의 여백' 이란 주제가 너무 어렵고 무거웠다는 지적도 적잖아 다음번 비엔날레를 위한 충고로 새겨봄직하다.

광주 = 윤철규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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