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슨주의의 핵심은 동의에 의한 통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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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호 20면

윌슨 대통령이 1916년 야구시즌 개막일 행사에 참석해 야구공을 던지고 있다. 그해 그는 가까스로 재선에 성공했다.

3·1운동은 온 나라 온 민족이 하나가 되는 소중한 체험을 선사했다. 오늘날 3·1운동은 얄궂게도 우리 사회에서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는 측면도 있다. 3·1운동의 주체 세력, 3·1운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원인을 따질 때 정치적 입장에 따라 결론이 상반된다. 미국의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1856~1924)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가 논란의 핵심이다.

민주와 자결 에레즈 마넬라 하버드대 석좌교수 인터뷰

민족자결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이나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일”을 말한다. 민족자결주의는 “민족자결의 원칙을 실현하려는 사상”이며 “1918년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하고 파리평화회의에서 채택되어 식민지 국가의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민족자결주의는 분명 3·1운동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한국사의 타율성을 주장한 일제 식민주의 사학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3·1운동에 민족자결주의가 미친 영향을 과장도 왜곡도 축소도 하지 않고 정확히 밝히는 것이 3·1운동의 정신을 이어가는 데 선결적 숙제인지 모른다.
이 숙제를 푸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외국 학자가 있다. 바로 하버드대 석좌교수인 에레즈 마넬라다. 마넬라 교수는 '윌슨주의적 순간:민족자결과 반식민 민족주의의 국제적 기원'을 2007년에 내놨다.

마넬라 교수는 한국·중국·인도·이집트에서 발생한 민족주의 운동이 윌슨의 수사를 활용했으나 운동의 내용은 자국의 문화와 정치적 상황에 따라 구성됐다고 주장한다. 마넬라 교수는 3·1운동을 비롯한 민족주의 운동의 국제적·국내적 원천의 접합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자결주의의 어제와 오늘을 따져 보기 위해 마넬라 교수와 24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다음은 그 요지.

에레즈 마넬라 교수

- 3·1운동에 영향을 준 외부적 요인으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와 러시아 혁명의 영향이 거론된다.
“문헌을 살펴보면 당시 상황에서 좌파의 영향력은 중대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강조하는 주장이 소급돼 제기된 것이다. 독립선언문에는 ‘윌슨적 수사(Wilsonian rhetoric)’가 명백히 나타나 있다. 민족대표 33인과 국내외 지도자들의 목적 중 하나는 당시 개최되고 있던 파리평화회의를 계기로 독립을 국제 여론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 민족자결은 독립이나 주권과 거의 같은 뜻인가.
“뜻이 겹치는 부분도 있으나 동의어는 아니다. 민족자결 개념을 많은 사람이 채용한 이유는 민족자결이 융통성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에 민족자결이란 궁극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는 게 목표였다. 다른 경우에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민족자결은 완전한 주권을 의미할 수도 있고 자치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 3·1운동이 중국의 5·4운동이나 인도·이집트 등지의 반식민 운동에 영향을 줬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어떻게 보는가.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하다. 5·4운동에 가담한 중국 지식인과 학생들은 3·1운동을 명시적으로 거론했다. 그들은 한국 상황을 면밀히 주시했다. 마오쩌둥도 1919년 여름에 3·1운동에 대해 논하는 글을 남겼다. 인도나 이집트의 경우에는 3·1운동이 언론에 보도되었으나 한국 상황을 심층적으로 따져 본 흔적은 없다. 3·1운동이 간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미국은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웠는데.
“그렇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주장으로 민족자결의 원칙이 1941년 대서양헌장에 삽입됐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는 인도를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미 행정부는 민족자결을 전후 세계 질서를 짜는 데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다.”

-민족자결의 원칙은 국가가 자신의 정치·경제 체제를 선택하는 권리를 포함하는가.
“그렇다. 미국과 소련은 민족자결을 표방했으나 자국 세력권에 있는 국가들이 이탈하려고 하는 경우 민족자결을 훼손했다. 민족자결의 원칙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상승 기류를 탔다. 그러나 냉전이 심화되면서 초강대국의 각종 이익과 충돌할 때 이 원칙은 좌절됐다.”

-민족자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사회주의자들 아닌가.
“맞다. 민족자결은 중부·동부 유럽의 사회주의 논의에서 발생했고 러시아 혁명의 볼셰비키파가 채용했다. 영국의 로이드 조지 총리와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 개념을 차용했다. 그러나 윌슨은 서구의 정치적·사상적 전통 선상에서 민족자결을 이해했다. 윌슨은 민족자결에서 ‘동의에 의한 통치’를 중시했다. 윌슨에 따르면 국민의 동의를 받지 못하는 권위주의 정부가 다스리는 나라는 민족자결이 이뤄지는 나라가 아니었다. 정부와 국민이 같은 민족이라도 정치 체제가 독재면 그 나라는 민족자결 원칙이 준수되는 국가가 아니라는 게 윌슨의 생각이었다.” 

-미국 역사에서도 3·1운동과 같은 거족적인 운동이 있었나.
“미국독립혁명을 들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상당수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3·1운동과 미국독립혁명 간에 유사점이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계화는 민족자결을 위협하는가.
“세계화가 국내 체제를 위협한다는 면에서 민족자결과 충돌한다. 긍정적인 면도 있다. 세계화는 동의에 의한 통치라는 가치를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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