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너 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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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상순(1961~ ), '너 혼자'

1. 너 혼자 올 수 있겠니

2. 너 혼자 올라올 수 있겠니

3. 너 혼자 여기까지 올 수 있겠니

안개가 자욱한데. 내 모습을 볼 수 있겠니. 하지만 다행이구나 오랜 가뭄 끝에 강물이 말라 건너기는 쉽겠구나. 발 밑을 조심하렴. 밤새 쌓인 적막이 네 옷자락을 잡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서 건너렴.

나는 삼십 센티미터의 눈금을 들고, 또 나는 사십 센티미터의 눈금을 들고, 또 나는 줄자를 들고 홀로 오는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1. 너 혼자 말해볼 수 있겠니

2. 너 혼자 만져볼 수 있겠니

3. 너 혼자 돌아갈 수 있겠니

바스락, 바스락, 안개 속에 네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네가 네 청춘을 밟고 오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하지만 기운을 내렴.

한때 네가 두들기던 실로폰 소리를 기억하렴. 나는, 나는, 나는, 삼십과 사십 센티미터의 눈금을 들고, 줄자를 들고, 홀로 오는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딩동동 딩동동, 네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내 소리를 기억하렴. 하지만,

1. 너 혼자 내려갈 수 있겠니

2. 너 혼자 눈물 닦을 수 있겠니

3. 너 혼자 이 자욱한 안개나무의 둘레를 재어볼 수 있겠니



마지막 인사로 제 시를 옮깁니다. 세계에서 시집이 가장 많이 출간되는, 가장 많이 사랑 받는, 모두가 시인인 나라. 이 땅에서 우리는 역사에 울다 사랑에 미쳐, 때로는 혼자여도 뜨겁게 살아 갑니다. 시여! 우리에게 축복을.

박상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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