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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나 하지 농구는 무슨…] 7. 프로농구 개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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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 1997년 2월 1일 열린 프로농구 개막식에 앞서 필자(왼쪽에서 셋째)가 준비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창립 총회를 연 지 불과 석달 보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팀 구성과 연고지 선정을 마무리하고 심판진을 갖춰 프로농구 원년리그를 치르게 된 것이다.

1997년 2월 1일. 일주일 전에 끝난 농구대잔치와는 또 다른 모습의 농구 경기가 서울 올림픽공원 제2체육관(펜싱경기장)에서 선보였다.

전날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화려한 전야제를 연 프로농구의 열기는 예고된 축제였다. 개막식 입장권은 1월 30일 예매를 시작한 지 여덟시간 만에 매진됐다. 8000원짜리 지정석 입장권과 6000원짜리 일반석 입장권은 2만~3만원짜리 암표로 둔갑했지만 그나마 구하기 어려웠다.

가수 신효범이 반주 없이 애국가를 열창했고, 김상하 농구협회장의 개회 선언, 윤세영 회장의 대회사, 김운용 대한체육회장의 축사와 김영수 문화체육부 장관의 격려사가 이어졌다. 대형 멀티비전을 통해 데이비드 스턴 NBA(미국프로농구) 커미셔너와 LA 레이커스의 간판 스타 섀킬 오닐의 축하 메시지가 방영되기도 했다.

개막전(대우-SBS)의 시구는 이수성 국무총리가 했다. 그런데 며칠 전 총리실에서 농구화를 준비해 달라고 연락이 왔었다. 시구자는 구두를 신고 플로어에 올라가도 괜찮다고 얘기했지만 꼭 준비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총리는 양팀의 장신 센터 사이에서 볼을 던지는 점프볼을 했다. 시구를 끝냈으니 코트에서 나와야 하는데 자신도 농구를 하겠다고 나서는 게 아닌가. 할 수 없이(?) 이 총리에게 자유투를 던지도록 기회를 줬다.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 총리는 서너 차례 시도 끝에 기어코 골을 성공시켜 갈채를 받았다. 이날 시구를 앞두고 이 총리가 특별히 농구 과외를 받았다는 뒷이야기를 듣고서야 "농구를 하겠다"고 고집부린 이 총리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한국의 프로농구 출범은 미국에서도 주요 뉴스로 소개되었다. 미국 NBC-TV는 스포츠 앵커 아마다 리샤드를 파견, 준비과정부터 개막 전야제, 개막식 행사를 다양하게 취재토록 해 미국 전역에 '아시아의 농구 열풍'이라는 제목의 특집 방송을 했다.

개막 경기가 무사히 끝났다. 나는 백남정 심판위원장, 김인건 경기위원장 등 그동안 프로농구 준비에 힘을 쏟아온 동료들과 경기장 인근 음식점에 갔다. "정말 수고했어." 소주 한잔 나누며 노고를 치하했다. 모두 몸은 파김치가 돼 있었지만 프로농구를 성공적으로 시작했다는 감격에 기분은 날아갈 듯했다. 아마 아기를 낳고 난 산모의 기분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올림픽대로를 달리다가 나는 운전기사에게 잠실운동장 근처 선착장으로 내려가도록 부탁했다. 차에서 내렸다. 어둠이 짙게 깔린 강물을 바라봤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기어코 해냈구나."

농구 선수로, 농구 지도자로, 이제는 농구 행정가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감격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도 잊고 마냥 서 있었다.

김영기 전 한국농구연맹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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