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보고세로읽기]검열이란 잣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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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비평을 업으로 삼고 있는 처지로서 여간 곤혹스럽지 않은 때가 있다.

비평 본연의 일이 아닌, 이를테면 비평과 제법 거리가 있는 일로 인해 난처함에 빠질 경우가 그렇다.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 에 연관된 요즘 상황이 대표적이다.

올초 작가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 가 문제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문학에 순정을 걸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비록 의견은 다르고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그 작품에 대해 최소한의 감정능력을 갖게 마련이다.

하지만 검찰은 그 작가를 '핫바지' 로 만들어버렸다.

굴욕적인 침묵을 강요한 것이다.

그 작품에 비판적인 비평가는 막상 자신의 행위가 문학에 대한 당국의 편견과 무지를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효과로 이어질지도 모를 비평외적인 걱정, 즉 일종의 정치적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거꾸로 자신의 생각과 달리 시치미를 떼고 그 소설을 좋은 작품이라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 순간 비평가 역시도 우리사회에서 존재하기는 하나 있으나마나한 '핫바지' 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나쁜 영화' 에 대해 비평적 논전 (論戰) 이 부실한 것도 마찬가지 상황에서 유래한다.

말하자면 작품 자체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기에 최악의 경우가 돼버린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에게 좀더 다양하고 깊이 있는 접근법과 감상의 관점을 제공하는 비평의 막중한 임무가 황망히 유실된 셈이다.

예술은 홀로 존재하는 법이 없다.

실제로 예술작품은 자신의 탄생과 소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감성과 도덕에 언제나 유능한 촉매역할을 자임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해 왔다.

작품에 대한 비평을 통해, 그리고 그 작품과 비평의 만남에 대한 수용자의 또 다른 만남을 통해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감수성을 보다 두텁게 하는 일을 감당했던 것이다.

때문에 작품에 대한 수많은 비평담론은 작품 하나만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의견이 모이고 갈라지는 중요한 공론의 장을 건설하는 소임을 맡는다.

또한 수용자들은 그 공론의 장을 무상으로 드나들며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혹은 교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술작품과 비평에 대한 수용자들의 천부적 권리기도 하다.

영화를 검열하고 '특정 관점' 으로 문제되는 장면을 잘라내는 일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단지 영화작품 하나에 대한 검열과 가위질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비평의 입을 막아버리는 망외 (忘外) 의 결과를 낳고 종국에는 수용자들의 천부적 권리를 박탈하는 일이 되는 법이다.

이 모든 것의 종합은 그런 문제를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 다각도로 논의하게끔 하고 그를 통해 사회 전체의 지력 (智力) 과 상상력을 끌어올리는 일의 밑둥을 싹뚝 잘라 버리는 야만행위일 뿐이다.

강조하거니와 예의 가위질이 계속되는 한 우리사회는 잘해야 천박한 졸부이고 못하면 후진국으로의 귀환이다.

<문화평론가 이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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