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재현 시시각각

워낭소리와 영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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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 할머니가 그 후에 정말로 집을 떠났는지 궁금해 어제 수소문했다. 마을 이장에게 묻자 “지금은 서울에 가 계신다”고 했다. 아예 이사를 간 것은 아니란다. 고령의 홀몸 노인에게 산골살이는 너무 버겁다. 그래서 11월이 되면 추위를 피해 자식이 사는 서울로 갔다가 이듬해 늦은 봄에야 돌아온다고 했다. ‘집으로’와 ‘서울로’를 반복한다니 할머니는 그나마 다행이다.

강원도 삼척의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에 살던 ‘산골소녀 영자’는 김 할머니처럼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오지 못했다. 유명세가 끔찍한 비극을 불렀기 때문이다. 2000년 TV 방송국의 휴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이영자(당시 18세)씨 이야기가 방영되자 전국에서 후원의 손길이 이어졌다. 팬클럽이 생겼다. 이동통신회사의 모델이 되어 CF 촬영도 했다. 후견인의 설득으로 경기도 후견인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컴퓨터를 배우고 검정고시 준비도 했다. 그러나 산골에 홀로 남은 아버지는 2001년 광고 출연료를 노린 강도에게 살해당했고, 믿었던 후견인마저 영자씨의 돈을 가로챈 혐의로 쇠고랑을 찼다. 한 출판사에서 영자씨 부녀가 쓴 작품이라며 시집을 출간했으나 곧바로 가짜 시비에 휘말렸다. 지난해 일간스포츠 보도에 따르면 이영자씨는 엄청난 일들을 겪은 후 불교에 귀의했다. 스물일곱 도혜 스님은 강원도 사찰에서 수도 중이라고 한다.

그제까지 관객 160만 명이 보았고 이번 주말 200만 명을 넘긴다는 독립영화 ‘워낭소리’의 촬영지 경북 봉화군도 걱정이다. 주인공 최원균(80) 할아버지 부부는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라고 한다. 경북도는 한술 더 떠 최 할아버지 집 주변과 김수환 추기경 생가(군위군), 경주 최부잣집을 ‘2009 경북 주말 테마여행’ 코스로 선정했단다.

고향에 목마르고, 추억이 그립고, 영성(靈性)에 젖어보고 싶은 심정들이야 이해한다. 그러나 좀 유명한 곳이 생기면 굳이 부득부득 찾아가 어지러운 발자국을 찍어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몽블랑 산꼭대기에 가서도 ‘왔노라, 보았노라’를 바위에 새기는 우리네다. 서해안 갯벌은 조개잡이 체험 ‘생태관광’ 탓에 곳곳의 생태가 이미 파괴됐다. 생태 체험이 아니라 약탈 체험이다. 산골소녀 영자는 그런 발길 탓에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다가 종교에서 겨우 안식처를 찾았다.

청정지대, 무균(無菌)지대를 원래 그대로 놔둘 수는 없는 것일까. 영화를 감상한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가 말이다. 경북도의 계획대로라면 봉화군 상운면 하눌리 마을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뻔하다. 영화에 등장하던 살갑고 느긋한 풍경들은 아마 사라지게 될 것이다. 몰려온 사람들에 이리저리 치이다 미구에 그나마 종적이 끊길 것이다. 한때 지자체들이 투자에 열을 올렸던 인기 TV드라마 촬영 세트장들도 요즘 거의가 흉물 취급을 받고 있지 않은가.

안 그래도 좁은 땅이다. 남길 것은 좀 남겨두고 살자. 온 국토를 마라푼다 개미처럼, 메뚜기 떼처럼 헤집고 다니는 행렬은 이제 멈추어야 한다. 남의 사정도 배려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사물화·대상화하는 습관을 이제는 버릴 때도 되지 않았는가.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