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up] 리무진 팔고 지하철 타는 회장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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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일 동일토건·동일하이빌 회장은 지하철 타고 다니는 모습을 찍자는 기자의 요청에 “기업인이 쇼하는 것 아니냐는 주변의 시선도 있지 않겠느냐”며 극구 사양했다. [강정현 기자]

중견 건설업체인 동일토건·동일하이빌의 고재일(70) 회장은 얼마 전 자신의 에쿠스 리무진 승용차를 팔았다. 대신 지하철·버스·택시·기차 등 대중교통 편을 매일 이용한다. 24일 그의 일정을 보면 서울 청담동 자택에서 택시로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가서 고속버스로 천안 본사에 출근했다. 이후 업무도 지하철과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다녔다.

“승용차를 안 타니 교통체증으로 짜증나는 일도 없고, 많이 걸어서 건강에도 좋습니다.”

세계적 경기침체 속에 구조조정으로 돌파구를 찾으려는 고 회장의 긴 일정은 새벽 6시부터 밤 10시 넘게 이어졌다. 지난해 시공능력순위 71위(동일토건), 86위(동일하이빌)의 중견 건설사를 이끄는 고 회장은 요즘 이런 대중교통 강행군을 반복하고 있다. 지난달 구조조정 일환으로 부사장 이상 임원들의 승용차와 기사를 모두 없앴기 때문이다. 고 회장은 “구조조정에 앞장서겠다는 뜻으로 스스로 내린 결심”이라고 말했다.

건설업체 최고경영자(CEO)로서 전국에 널린 현장을 찾아 다녀야 하는 데 대중교통은 시간 낭비가 아니냐는 질문에 고 회장은 “대중교통 이용이 시간상으로 결코 손해가 아니더라”고 말했다. 서울~천안 구간을 승용차로 오가는 것과 지하철·KTX 등을 이용하는 시간은 별 차이가 없다는 것. 교통 체증이 심한 서울 시내는 지하철이 더 빠른 경우가 많다고 했다. 지하철을 이용할 때는 가끔 65세 이상 노인에게 주는 무료 승차권을 이용하기도 한다.

다만 직원들의 체면과 주변의 시선을 그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가뜩이나 어려운 때에 회장이 너무 비용 절감만을 강요한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채권단 등에 잘 보이려는 것 아니냐는 일부 곱지 않은 시선도 없지 않다.

이런 지적에 대해 고 회장은 “전쟁과 다름없는 비상시기에 회장이 솔선수범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사실”이라며 “구조조정의 경우 다른 방안은 모두 상대방과 합의해야 이뤄지지만 승용차를 없애는 것은 개인적인 불편함만 감수하면 당장 실행에 옮길 수 있어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고 회장은 “건설업계가 일시적인 유동성 문제는 있지만 우리 회사의 경우 실력은 충분하다는 점을 알리겠다는 뜻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동일토건과 동일하이빌은 지난달 20일 채권단의 신용위험평가에서 B등급을 받았다. C등급부터인 워크아웃은 피했지만, 자체적인 회생을 위해서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했다.

우선 서울의 동일하이빌 본사를 동일토건 본사가 있는 천안으로 이전, 조직을 통폐합했다. 인천 연수지구와 서울 동작구 등 요지에 있는 사업부지 매각도 추진 중이다. 법인 골프회원권 등 돈 되는 것은 모두 팔았다. 임원은 20%, 직원은 10%씩 급여를 반납했다.

이와 관련, 그는 ‘속죄의 의미’도 담았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아파트만 잘 만들면 될 것으로 믿었다”며 “그러나 유례없는 불황 속에 집 잘 짓는 ‘실력’만으로는 부족했다”고 그는 말했다. CEO로서 어떤 어려움도 견뎌야 하는 기업 경영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속죄를 하겠다는 뜻이다. 고 회장은 최근 미분양 아파트의 분양가를 4~10% 내려 소비자들에게선 칭찬을 받았지만 경쟁업체들로부터 눈총도 받았다.

동일하이빌은 1999년 경기도 용인에서 ‘지상에 차가 없는 아파트’를 처음 선보이며 주목을 끌었다. 지하 주차장만 만들고 지상은 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또 업계에서 처음으로 아파트 입주민 소유의 ‘미디어센터(PC방, 노래방 등)’를 마련한 것도 이 회사다. 카자흐스탄 행정수도 아스타나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만든 것도 국내에서 이 업체가 최초다. 이를 바탕으로 설립 10여 년 만에 중견 건설업체로 성장했다.

그런데 고 회장이 최근 정말 고심한 것은 따로 있었다고 한다.

동일토건과 동일하이빌의 조직 통폐합으로 업무가 겹치는 인력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결국 무리한 인력 구조조정은 하지 않기로 하고 희망퇴직을 일부 받기로 했다. 남은 직원들에게는 유급 순환 휴직 제도를 도입, 근속연수에 따라 기본급의 40~70%만 주고 고용을 유지할 계획이다.

휴직 인원들에게는 장래 회사의 재도약에 대비해 능력을 키우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공인회계사 출신인 고 회장은 50대 후반에 창업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1995년 고급 연립주택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한때 고전하기도 했다.

그는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는 혼자 고민해 스트레스로 원형탈모증이 생겼을 정도였다”며 “그래도 지금은 함께 고민하고 헤쳐나갈 임직원과 조직이 있으니 다함께 노력하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녕 기자 ,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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