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한국양국 세계석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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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50m쯤 떨어진 곳에 어린이를 세워놓고 그 머리위에 사과를 올려놓은 다음 활을 쏴 사과를 맞히는 것과 비슷한 거리에 있는 나무의 가지에 옥가락지를 걸어놓고 역시 활로 쏴 맞히는 경우 어느 쪽이 더 어려울까. 사과를 쏴 맞히는 일은 어린이의 생명이 걸려있는 문제니 위험하기로는 비교할 바가 못되지만 활쏘기의 정확도를 따지는 측면에서는 물론 옥가락지를 맞히기가 훨씬 어렵다.

앞의 것은 스위스에 전해내려오는 '빌헬름 텔의 전설' 이고, 뒤의 것은 고구려 건국설화에 나오는 동명성왕의 이야기다.

텔도, 동명성왕도 성공했으니 과연 동.서양을 대표하는 명궁 (名弓) 이요, 신궁 (神弓) 이라 할만 하다.

둘 다 어렸을 때부터 세상이 알아주는 활의 명수였다지만 특히 동명성왕은 단 한차례의 실수도 보인 적이 없어 일찍부터 주몽 (朱蒙) 이라 불렸다고 전한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활 잘 쏘는 사람을 선사 (善射) 라 칭했는데 朱蒙은 바로 선사의 부여 (夫餘) 말이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를 훑어보면 주몽 이외에도 명궁으로 꼽힐만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그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들도 많다.

가령 고려 18대 임금이었던 의종 (毅宗) 은 과녁위에 촛불을 켜놓고 그것을 맞혀 꺼지게 했다든가, 역시 고려 문종 (文宗) 때 유현 (惟現) 이란 장수는 쏜 화살이 대동강을 건넜다는 따위의 일화다.

한데 전문가들에 따르면 우리 활 (國弓) 이 서양 활 (洋弓) 보다 쏘기가 훨씬 어렵다고 한다.

예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우리의 전통적 궁술 (弓術) 은 너무 까다롭고 복잡해서 제대로 따라하기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양궁은 비교적 빠르게 우리에게 정착한 듯한 느낌이다.

세계에서 양궁대회가 처음 열린 것은 영국 헨리8세 때인 1538년이었으나 우리나라는 1962년 한 미군장교가 남산 활터에서 시범을 보인 것이 처음이었으니 무려 4백20여년이나 늦은 것이다.

하지만 불과 17년 후인 79년 서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김진호 (金珍浩)가 6종목중 5종목을 석권한 이후 한국은 전세계가 인정하는 '양궁 강국' 으로 발돋움하기에 이르렀다.

엊그제 캐나다 빅토리아 세계선수권대회에서의 남녀 개인.단체 등 전종목 제패는 정상의 재확인이었다.

꾸준한 기술개발과 맥을 잇는 후진양성으로 정상의 자리를 오래 유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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