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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산업’ 키워 여성 인재 활용 늘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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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울대의 여학생 비율이 매년 늘더니 올해는 전체 신입생 3400여 명의 40%를 넘었다. 대학에선 남녀학생 비율에 걸맞게 여자 교수를 늘리려 한다. 하지만 강사를 포함해도 여전히 전체 교원의 20%에 못 미치고, 그나마 전임 여교수는 10%에 불과하다. 왕성하게 활동해야 할 젊은 시절에 살림·육아·교육 등에 발목 잡혀 교수가 되기에 필요한 성과를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디 대학만의 문제일까. 우리나라의 여성 경제활동 인구는 미국의 69%에 훨씬 못 미치는 54%쯤이다. 보수도 남성의 69% 정도에 불과하다.

훌륭한 교육을 받은 고급 인재들임에도 가사에 묶여 사회에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여성이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다. 실로 딱한 노릇이다.

1970년 62세이던 우리나라 국민의 평균수명은 십 년에 네댓 살씩 늘더니 어느덧 80세에 이르렀다. 육십 평생이던 예전에는 생애의 40%가 되는 24세에 대학을 마치고, 90%가 되는 55세쯤 은퇴해 오륙년 소일하다 생을 마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수명이 길어지며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이런저런 공부를 마치고 55세에 은퇴해도 생애의 70%가 지났을 뿐이다. 그 20여 년을 버텨 내야 하는 막막한 팔십 평생이 된 것이다. 두 번의 경제위기를 겪으며 보험도 펀드도 믿을 수 없게 돼 노후는 더욱 불안하기만 하다. 은퇴 후 20년을 어떻게 버틸 것인가.

그러나 보고 배울 만한 고령화 선진국도 없다. 우리보다 한발 앞서 고령화 문제를 겪고 있는 일본 역시 많은 문제를 겪고 있다. 2030년이 되면 우리나라는 집집마다 4인 가족 기준으로 경제력이 부족한 노인이 한 명씩 있게 된다고 한다.

건강관리보험공단은 지난해 전 인구의 10%인 노인이 전체 보험료의 29%를 쓰고 있다고 발표했다. 소득이 없는 노인들을 부양하는 사회적 비용이 갈수록 늘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령화 사회의 부담을 나눠질 수 있는 젊은 노동인구를 확충해야 한다. 상황은 좋지 않다. 지난 2년간 쌍춘년과 황금돼지해 효과로 반짝 상승했던 출산율은 다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가뜩이나 높은 육아와 교육 부담으로 젊은 여성들이 출산을 꺼리는데 경제위기까지 겹쳐 출산율이 1.0명 이하로 내려갈 가능성까지 있다고 한다. 이같이 20~30년 후 사회를 지탱해 나갈 노동력이 갈수록 줄어드는데 언제까지 여성 인재를 사장시킬 수는 없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의 돌파구는 고학력의 젊은 여성 노동력을 활용하는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그에 걸맞은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얼마 전 한 제자가 대학에서 두 시간 거리인 서울 상계동으로 이사했다. 직장을 다니는 부인이 지난해 아기를 낳았는데 사설 육아 시설에 맡기기는 영 미덥지가 않고 공립 육아 시설은 주변에서 찾을 길이 없어 나이 드신 이모님 댁 근처로 이사해 육아를 부탁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육아를 안심하고 기댈 곳이 피붙이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며칠 전 SBS 스페셜이 방영한 ‘아키타 산골학교의 조용한 기적’은 좋은 시사점을 던져줬다. 초등학생 딸을 둔 산골의 맞벌이 부부 얘기인데 그곳에선 학교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이 협력해 보충학습과 가정교육을 맡아 준다. 아이 엄마는 늦은 귀가나 아이 교육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맞벌이 핵가족의 교육문제에 세대 간 협력을 활용한 아키타현은 일본 최강의 초·중등 교육 지역이 됐다.

이처럼 고령 노동력에 적절한 훈련을 접목시켜 살림·육아·교육 등 가사를 규격화한 산업, 가칭 가정산업을 키워 나가면 어떨까. 가정산업이 성장하면 여성의 경제활동을 활성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노인 입장에서도 쾌적한 환경에서 일정한 수입을 유지하고 새 세대에게 전통을 전하면서 지낼 수 있다면 은퇴 후 20년이 막막하거나 헛되지 않을 것이다.

세대 간의 협력으로 젊은 맞벌이 부부는 안심하고 아이를 키우고, 고령 세대는 소득을 올리면서 젊은 세대와의 스킨십을 유지해 건강한 노후를 보낼 수 있으니 모두에게 득이 되는 올 윈(all win) 게임인 셈이다. 정부와 자치단체가 주체가 돼 철저한 감독과 지원을 한다면 가정산업을 육성하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가정산업을 신성장동력 사업으로 육성할 수 있느냐에 우리 사회의 미래가 걸렸다.

이정재 서울대 교수·지역시스템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