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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반지 내다팔고 유모차는 빌려 써…”

중앙일보

입력

월간중앙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경제위기,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물가상승과 실업률 증가.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황의 긴 늪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사회 각 분야에서 불황에 반응하는 모습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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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의 여파로 가계 소득이 줄면서 덩달아 소비도 위축되고 있다.

끔찍한 자살사건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 특히 부정도, 모정도 버린 채 자신의 아이들까지 동반자살로 몰고 가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지난 2월6일 부산 해운대구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보자.

어제는 ‘웰빙’, 오늘은 ‘생존’… 자살·범죄·도박 급증 #불황의 그늘 #침체된 경제의 시대상

새벽 2시쯤 이곳의 오피스텔에서 32세의 한 여성이 다섯 살 난 자신의 딸을 창 밖으로 던지고 자신도 13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이 여성은 운영하던 중국집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후 대리기사로 일하는 남편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가난으로 괴로워하다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사건이 같은 지역인 부산에서 또 일어났다. 지난 2월10일 부산 동래구 안락동의 한 주택 방 안에서 38세의 여인과 다섯 살 난 딸이 함께 숨져 있는 것이 발견됐다.

경찰은 발견 당시 방 안에 다 탄 연탄이 들어 있는 화덕이 있었던 점으로 미뤄, 엄마인 여성이 방 안에 연탄을 피워놓고 딸과 함께 동반 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여성은 남편과 이혼한 후 혼자 딸을 키우며 양육비를 고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적 경기침체와 우리 경제를 뒤덮은 불황의 그늘 아래 놓인 서민들은 집단적 공황상태에 빠져있다.

그 중에서도 최저의 생활을 하는 극빈층은 물가는 오르는데 수입이 없는 절박한 상황이다. 결국 절망의 끝에서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마는 것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경기침체의 긴 터널 안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는 이런 현상을 ‘터널비전현상’이라고 한다.

평소에는 차분하고 냉정하게 판단하던 사람도 불황기에는 불안과 스트레스 때문에 성급하게 최악의 선택을 하는 것을 뜻한다. 경제적 고민으로 인한 가족 동반자살이 급증하는 반면 다른 한 편에서는 절도 등의 생계형 범죄가 늘고 있다. 가계소득이 줄고 실직 가정이 늘면서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다. 불황에는 절도사건이 많아진다는 공식 때문에 보안업체 주식에 투자해야 한다는 조언까지 나오는 마당이다.

급증하는 자살과 조직폭력배들의 칼부림

신용경색과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한동안 눈에 띄지 않던 ‘카드깡’도 다시 나타났다. 여신금융협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 일명 카드깡으로 카드사들이 가맹점을 제재한 건수가 1만2,349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1.7%나 늘어났다고 밝혔다. 불법으로라도 급전을 쓰려는 사람들이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불황을 틈타 ‘어둠의 세력’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최근 조직폭력배들이 적극적으로 활동을 재개해 집단 칼부림을 벌이고, 대마초 압수량이 3배 이상 늘어나는 등 적발건수가 늘어나 대검찰청이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음지에서 돈줄을 잡고 있는 이들도 경기침체로 인해 다급한 상황으로 몰렸다는 분석이다.

검찰과 경찰이 단속을 벌여 오락기 판매 범죄 수익금을 몰수하자 규모가 작은 성인오락실들도 이권다툼의 대상이 되어 치열한 난투극까지 벌이는 상황이다. 어둠의 세계도 그만큼 돈이 바닥났다는 것이다. 이런 사건·사고들은 9시 뉴스에서나 접할 수 있는 불황의 흉흉한 그림자다.

어째 남의 일 같은 이야기지만 사실 우리의 일상생활도 이미 경제침체기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 있다고 보는 것이 무방하다. 평범한 직장인들도 언제부터인가 직장 회식과 술자리가 줄어든 것을 피부로 느낀다고 한다. 리서치 전문기관 엠브레인이 전국 직장인 1,034명을 대상으로 최근의 술자리 횟수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의 61.8%가 “지난해에 비해 술자리가 줄었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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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인근 거리에 위치한 옷가게. 5,900원이라는 가격으로 할인행사를 하고 있다.

아끼고 또 아끼는 ‘불황의 경제학’

같은 기관에서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는 전체의 15.5%가 부업을 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지난해 5월 같은 조사의 12.9%에 비해 2.6%포인트 늘어난 수치다. 이들 중 대부분이 경기침체가 본격화한 지난해 하반기 이후부터 부업을 시작한 것으로 답해 어려운 시기를 맞아 ‘투잡(two-job)족’으로 살기 시작한 이들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향후 부업을 하고 싶다”고 답한 직장인도 66.9%에 달했다. 바깥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이처럼 허리띠를 졸라매는데 알뜰한 가정주부들 역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펀드 수익률이 치솟고 남편 보너스도 때마다 들어오던 시절에는 가끔씩이라도 가전제품 하나씩 들이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한 푼이 아쉬운 요즘에는 있는 물건을 고쳐 사용하고 정 필요한 제품은 빌려 사용한다. 지난 2월14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분기별 가전제품·컴퓨터 소매업의 매출이 1~3분기 동안 각각 4.2%, 6.9%, 3.6%로 점차 감소했고, 4분기에는 8.4% 감소해 2004년 4분기 이후 4년 만에 마이너스로 전환했다.

이런 최악의 수치는 가정주부들이 지갑을 닫고 절약하는 생활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반면 가전제품 수리업의 매출은 지난해 1분기 3.1%, 3분기 6.0%, 4분기에는 10.7% 증가했다. 각 가정이 긴축재정으로 돌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요즘은 아이들 돌잔치 때 받은 반지까지 장롱에서 꺼내 내다 판다.

결혼예물과 각종 귀금속을 더하면 귀금속 도매상에서 제법 큰 현금으로 바뀌어 나온다. 국제적으로 금값이 상승해 요즘 매입가격이 순금 3.75g(한 돈)에 10만 원에서 14만 원으로 가파르게 올랐고, 하루에도 1,000~2,000원씩 뛰고 있다. 수입이 줄어든 서민들의 행렬이 귀금속 전문점으로 줄을 잇고 있다.

그늘이 있으면 빛도 있는 것일까? 불황에 오히려 매출이 증가하는 곳도 있으니, 바로 상품 대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터넷 쇼핑몰들이다. ‘롯데닷컴’은 지난해 11월부터 시작한 악기 대여 서비스 이용객이 최근 한 달새 6배나 급증했고, ‘11번가’의 아동침대 대여 서비스는 지난 1월 주문이 전월 대비 15% 증가했다고 밝혔다.

살림이 어려워도 아이들에게는 새 옷, 새 가구를 사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이지만, 그마저 요즘에는 멈칫하는 추세다. 유모차와 육아용품 등 아이들이 어릴 때 잠시 쓸 물건은 업체에서 빌려 쓰는 사람이 많아졌다. 또 호황을 누리는 곳이 있는데 바로 강원랜드다. 경기 불황에는 사행산업이 커진다는 말을 입증하듯 지난해 연 매출 1조 원을 넘어서면서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최근 경찰의 집중단속으로 인해 사그라지기는 했지만, 인터넷에서의 도박열풍 역시 만만찮다. 자포자기한 서민들이 사행성 게임에 빠져들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생필품 중에서는 라면 판매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경기가 침체되자 라면업체의 매출 급증은 더욱 두드러졌다.

최근까지 ‘웰빙’을 외치던 유행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주머니가 가벼워지자 가장 싸게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라면이나 삼각김밥 등이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다. IMF의 파고를 넘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위기의식을 느끼면 최대한 아낄 수 있는 부분의 지출을 줄이는 습성이 남아있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도 가급적 돈을 안 쓰는 선에서 해결하고, 그 외의 품목에서는 가급적 소비를 줄인다.

최근에는 문을 닫는 병원들이 속출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의료업계의 매출은 전년 같은 달보다 3.9% 늘어나는 데 그쳐 3년8개월 만에 최저의 증가율을 보였다. 변호사·건축가·회계사·법무사 등도 마찬가지로 일제히 수입 감소세를 보였다. ‘밤문화산업’도 불황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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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 부수가 떨어진 해외 유수의 잡지들이 스타의 누드 사진을 표지로 내세우고 있다. 지난 1월호 표지에 누드로 등장한 제니퍼 애니스톤.

최고의 여성들이 등장한다는 일명 ‘텐프로’ 업소가 최근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관계자들이 전한다. 이런 가게는 목 좋고 임대료가 비싼 지역이기 때문에 일정 정도 수익이 나지 않으면 금세 가게 문을 닫아야 한다. 이 틈을 타 ‘쩜오’라고 불리는 텐프로 다음 등급의 업소들이 늘었지만, 이들도 수입이 줄기는 마찬가지. 아가씨들 매상이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법인카드를 들고 접대를 위해 들르던 기업 관계자들의 발길이 끊기면서부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강남 고급 업소에도 색다른 문화가 들어서는 판국이다. 고급을 지향하던 업소들도 체면을 버리고 손님 잡기에 나섰다. 고급 술집에서는 볼 수 없던 질펀한 쇼가 이곳에서 벌어지고, 2차를 룸에서 하는 변종 영업까지 등장했다.

한편 해외에서는 그들 특유의 문화에 불황이라는 시기적 요소가 더해져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현상으로 나타나고는 한다. 밸런타인데이를 앞두고 데이트 주선 사이트가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데이트 비용만은 아끼려 한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보도했다. 보통 데이트를 위해서는 근사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게 마련인데, 이때 남자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 만만찮다.

그래서 저녁 데이트 전 상대에게 전화를 걸어 “일이 늦게 끝나니 밥을 먹고 만나자”고 제안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우리 돈 2만 원 정도를 내고 데이트 주선 사이트를 이용해온 것에 비해 최근에는 무료 사이트가 급증했다는 것도 특징이다. 미국에서는 아예 돈이 한 푼도 들지 않는 온라인 데이트가 인기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무료 인터넷 중매 사이트에서 채팅 등으로 데이트를 즐기는 사람이 늘고 있다. 주요 사이트를 보면 하루평균 온라인 만남 횟수가 13만 건에 달하는 등 전년대비 60~80% 가량 늘었다. <뉴욕타임스>는 “실업과 불완전 고용이 늘어 웹서핑을 할 시간이 많아진데다 온라인 데이트는 비용도 들지 않기 때문에 많이 찾는다”고 보도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이 정도의 자린고비 데이트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커플링의 색깔은 바뀌는 분위기다. 인터넷 쇼핑몰 G마켓은 지난 1월 한달간 은제품 판매가 전년대비 30% 상승한 반면 금제품 판매는 20% 하락했다고 밝혔다. 또한 연애와 결혼에서 경제적 능력이 중요시되는 풍조가 확고히 자리 잡았다.

한 여성포털 사이트가 네티즌들을 대상으로 ‘배우자와 연인에게 서로 바라는 것은?’이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응답자의 40%가 ‘경제적 안정’을 우선으로 꼽았다. 최근 방송 관계자들은 오히려 불황의 덕을 보고 있다. 주머니 사정이 나빠지자 회식이 줄어들고 일찍 귀가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방송 프로그램 시청률이 급상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린고비 데이트에 커플링은 은으로…

지난 2월9일 지상파 방송의 시청률을 모두 합하면 66.5%에 달했다. 그 동안 케이블 방송의 선전과 인터넷 사용 시간이 길어진 탓에 지상파 방송은 시청률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실정이었다. 불황이 낳은 또 다른 풍경이다. 미국의 대중매체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불황의 기운이 감지된다. 지난 2월8일 열린 그래미상 시상식의 중계방송 광고시간에 14개 미국 도시에서 ‘앱솔루트 보드카’ 광고가 방영됐다.

미국 지상파 방송 황금시간대에 주류 광고가 등장한 것은 몇 년 만에 있는 일이다. 그 동안 방송사는 공익에 위배된다는 생각에 황금시간대의 주류 광고를 자제했지만 경기침체로 광고가 급감하자 태도를 바꿨다. 한 관계자는 “광고시장이 바닥까지 왔다”고 자평했다. 대중문화의 총아인 할리우드 스타들은 너도나도 옷을 벗어 던지고 있다.

판매가 부진한 잡지들이 앞다퉈 표지에 톱스타들의 노출사진을 싣고 있는 것이다. 지난 1월호 표지에서 제니퍼 애니스톤이 넥타이 하나만 목에 두른 누드 사진을 선보인 데 이어 이번에는 세계적 모델 하이디 클룸이 독일판 표지에 나체로 등장한다. 꼭 집어 말하지 않더라도 최근 각종 외국 잡지들의 표지가 전반적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스타들이 과감히 노출한 화보를 통해 떨어진 판매부수를 끌어올리려는 계산 때문이다. 지금은 지구촌 전체가 불황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다. 온 사회가 만성적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할 정도로 전반적인 분위기가 침체된 상태다. 불황의 그림자가 세계경제에 남길 상흔이 얼마나 심각할지, 얼마나 오래 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낙담과 불안감만 더욱 커져가고 있다.

박미소 기자 smile8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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