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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금융불안 해소의 정공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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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최근 기아사태의 장기화로 한때 안정돼가는 듯하던 우리 금융시스템이 다시 불안해지고 있다.

11%대에서 안정적인 움직임을 보이던 회사채수익률이 최근 12.3%까지 급등했고, 원화환율도 90년초 시장평균환율제도가 도입된 이래 최고 수준인 달러당 9백원대에 육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이은 대기업의 부도로 신용경색이 확산되면서 중앙은행이 통화를 신축적으로 공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금이 기업으로 중개되지 못하는 자금순환의 경색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제 부도사태로 직격탄을 맞은 은행뿐 아니라 자본력이 취약한 일부 종금사들도 실질적인 부도사태에 빠진 실정이다.

그러면 연초 이래 왜 이렇게 금융위기가 재발하고 있는가.

그 첫번째 해답을 찾기 위해 먼저 부도기업의 면모를 살펴보자. 한보.진로.대농, 그리고 기아의 도산에서 우리는 구조적인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의 사업구조는 경쟁격화와 과잉투자로 90년대 이후 수익률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는 20세기형 전통산업에 치우쳐 있다.

그리고 이들은 한결같이 부채의존도가 과다해 기업에 따라서는 매출액이 부채총액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경기가 부진해 매출이 둔화되면 기업의 현금흐름이 급격히 악화돼 기업은 부도의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올해 들어 도산하고 있는 대기업들은 경제가 개방화되고 자율경쟁이 강조되는 새로운 경영환경 아래서 고부가가치산업으로의 구조조정에 실패한 기업들이라 할 수 있다.

둘째로 그동안 누적돼 온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이 금융기관의 대내외 신용도를 악화시키고 중개기능을 마비시켜 금융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

관계당국의 공식통계에 의하면 일반은행의 '부실여신' 은 3조원 내외로 총여신의 1%에도 못미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다 선진국의 경우와 같이 6개월 이상 연체중인 '불건전여신' 을 합치면 연이은 대기업부도로 인해 이미 20조원을 초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연초이래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은 정크본드 수준의 프리미엄을 주고도 해외차입에 어려움을 겪어 만성적인 외환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 기초할 때 최근의 금융위기상황은 통화의 확대공급과 은행및 종금사에 대한 외화지원, 부도방지협약 등과 같은 미봉책으로는 근본적으로 치유될 수 없는 것이다.

아직 부도가 나지 않은 우리나라 대기업중 사업구조나 부채비율면에서 기아보다 못한 기업들이 많은 점을 감안할 때 앞으로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고서는 제3, 제4의 금융위기를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정부는 신용공황을 타개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응을 자제하고 시장메커니즘에 의한 자율적인 해결에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하다.

물론 세계무역기구 (WTO) 협약과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규약에 충실해야 할 정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우리의 금융시장은 정부의 역할을 대신할 자율적인 조정능력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과거 개발경제체제 아래서부터 누적돼 온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금융의 자율화도 금융시장의 효율화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의 경우 80년대말 저축대부조합이 파산위기에 처하자 연방예금보험공사와 정리신탁공사가 주축이 돼 부실금융기관 정리와 부실채권해소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미국의 금융기관들은 경쟁력을 회복해 기업들이 첨단정보산업으로 구조조정해 나가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제 우리 정부도 부실채권해소를 위해 지원조건과 규모에 대한 투명한 룰을 설정해 이를 더 적극적으로 실행해나가야 한다.

실로 지금은 금융감독기능의 통합, 중앙은행의 독립, 그리고 금융기관 업무영역조정 등에 앞서 반복되는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제고하기 위해 부실채권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시점이다.

정문건 삼성경제연구소 상무,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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