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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와인과 전통음식을 세계화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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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호 14면

20일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이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사우스 비치 와인 앤 푸드 페스티벌’에 참석해 환영 인파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국왕 앞쪽은 소피아 왕비. 이번 행사에선 스페인 와인과 전통 음식들이 소개됐다. 마이애미 AP=연합뉴스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의 발걸음이 바쁘다. 카를로스 국왕과 소피아 왕비는 16일 자메이카, 17일 트리니다드 토바고를 각각 방문했다. 자메이카에선 항공협정에 서명하고,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선 천연가스 도입을 논의했다. 18일엔 미 플로리다주 펜사콜라시를 방문해 스페인 정착지 건설 4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펜사콜라는 스페인 모험가가 만든 도시다.

美 마이애미서 세일즈 외교 나선 카를로스 국왕 부부

국왕 부부는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중·고교 학생들은 거리에서 스페인의 삼색기를 상징하는 옷을 입은 채 국왕 사진이 들어있는 플래카드를 흔들며 “사랑해요”라고 외쳤다. 카를로스 국왕은 “펜사콜라는 스페인의 유산을 누리고 있다. 많은 라틴 아메리카 출신들이 이곳에서 일하며 삶을 일궈가고 있다”며 미국과 남미 대륙에 스페인 문화가 스며있음을 강조했다.

19일 그는 곧바로 마이애미로 향해 ‘사우스 비치 와인 앤 푸드 페스티벌’ 전야제에 참석했다. 스페인 국기를 연상케 하는 플래카드가 사방에 걸려 있어 마치 스페인을 미국에 옮겨놓은 듯한 분위기였다. 이 행사의 주제는 스페인. 스페인의 와인과 전통 음식들이 다양하게 선보였다. 특히 카를로스 국왕과 소피아 왕비가 직접 참석해 지역 축제에 불과하던 이 행사의 격(格)이 달라졌다. 전야제에는 ‘국왕과 함께 하는 만찬’ 행사가 열렸다. 행사 참가비는 1인당 1000달러나 되지만 수백 개의 좌석은 일찌감치 동이 났다. 만찬의 요리를 책임진 요리사 페드로 소비야나는 “국왕을 위해 조개와 올리브 오일로 만든, 스페인 바다를 연상시키는 요리와 최고의 스페인 와인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국왕은 20일 낮 12시에 열린 페스티벌 개막식에서 테이프 커팅을 했다. 마이애미는 ‘스페인어를 못 하면 식당에서 주문도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을 만큼 히스패닉계 주민이 많이 사는 곳이다.

20일 그는 또 제임스 존스 미국 국가 안보보좌관과 대체에너지 비즈니스 콘퍼런스를 열었다. 국왕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구 차원의 온난화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대체에너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페인은 국가 에너지의 10%를 풍력발전으로 충당하고 있는 대체에너지 선진국이다. 카를로스 국왕은 “스페인과 미국 사이의 무역 확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스페인은 대체에너지에 대한 투자를 더욱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카를로스 국왕에게 직접 전화해 캐나다 순방 때문에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는 데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국왕과의 전화 통화에서 오바마는 “양국은 앞으로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카를로스 국왕의 이번 방미는 단순히 스페인 축제에 참석한다는 차원을 넘어선다. 스페인이 주력하고 있는 스페인 음식의 세계화 전략을 위한 것이다. 관광대국 스페인은 최근 식품산업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고 있다. 올리브 기름과 와인은 주력 수출상품이다. 히스패닉 인구가 늘고 있는 미국은 새로운 시장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 스페인 인터넷 신문 ‘싱크 스페인’은 16일 “국왕 부부는 스페인 대표로 마이애미 푸드 페스티벌에 참석했다. 이는 전 세계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세계 최대 식품 시장(미국을 지칭)에 진입한 것을 의미한다”고 보도했다.

카를로스 국왕은 현재 스페인을 대표하는 최고의 브랜드다. 스페인뿐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인기가 높다. 그가 나타나는 곳마다 인파가 넘치고 환호성이 터진다. 과거 중남미 국가들은 스페인의 가혹한 식민 통치를 경험했다. 그런 곳에서 스페인 국왕이 열광적인 환호를 받는 것은 일견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현지 언론들은 ‘스페인의 과거 만행에 대해 사죄부터 해야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카를로스 국왕에게 호의적이다. 그가 지난 20여 년간 라틴 아메리카에 기울여온 노력 때문이다. 남미인들의 거부감이 잦아든 가운데 남미 국가들은 스페인과의 경제 협력에 나서고 있다. 카를로스 국왕은 1991년 스페인어·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남미 대륙 18개국과 포르투갈·브라질·스페인이 참여하는 제1회 이베리안-아메리칸 정상회담 개최를 주도했다. 99년에는 국내 정치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산국가이자 미국의 적대국가인 쿠바를 방문했다.

90년대 남미는 ‘미국의 앞마당’이라고 불릴 만큼 미국에 종속돼 가고 있었다. 카를로스 국왕은 미국의 일방주의를 견제하고 싶어하는 남미인들의 심리를 이용해 스페인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스페인은 남미와 유럽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프랑코 독재 잔재 씻고 민주화를 선도
그는 1938년 망명지 로마에서 쫓겨난 스페인 왕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프랑코 총통의 스페인 독재 시절이었다. 카를로스 국왕은 프랑코의 계획과 안배에 따라 국왕 수업을 받았다. 프랑코의 독재 체제를 지속하기 위한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하지만 75년 프랑코가 죽은 후 국왕에 오른 카를로스는 스페인을 의회민주주의 국가로 바꿨다. 77년 총선거를 실시해 의회를 구성하고 78년 신헌법을 만들어 입헌군주제를 확립했다. 81년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자 이를 진압하고 민주화 체제를 지킨 사건은 국민들의 지지와 사랑을 얻는 결정적 계기였다. 당시 군부 세력은 무력을 동원해 내각 각료와 의원 등 350여 명을 인질로 잡고, 언론을 장악했다. 하지만 카를로스 국왕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TV에 출연해 쿠데타 반대 연설을 했고, 그를 따르던 군부가 진압군 쪽으로 돌아섰다.

입헌군주제 하에서 국왕은 상징적인 국가수반이다. 하지만 영향력은 막강하다. 세계 각국의 정상들은 스페인을 방문할 때 총리가 아니라 국왕을 찾아가 정치·경제 현안들을 논의한다. 2년 전에는 국왕이 베네수엘라의 독재자 우고 차베스와 독설을 주고받아 화제를 낳았다. 2007년 칠레에서 열린 이베리안-아메리칸 정상회담에 참석했을 때 차베스가 “스페인의 전 총리는 파시스트”라며 비난하자 국왕은 “입 닥쳐”라고 응수한 뒤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 덕분에 “입 닥쳐”라는 그의 말은 한동안 스페인 국민들의 휴대전화 벨소리로 인기를 끌었다.

최근에는 그가 왕세자 필리페에게 보내는 편지가 공개됐다. 이 편지에서 그는 “왕족이란 특권이 아니다. 피곤해도 생기있게 보여야 하며, 흥미 없는 이야기에도 흥미를 보여야 하며, 고생스럽더라도 남을 도와야 한다. 자연스럽지만 속되게 보여선 안 되며, 문제를 잘 알고 있어야 하지만 세부적인 것에 얽매이거나 잘난 척해선 안 된다. 언론을 존중해야 하지만, 동시에 언론이 너를 존경하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박정윤 KOTRA 마드리드 무역관 과장은 카를로스 국왕을 가리켜 ‘스페인 국민이 갖는 자부심의 원천’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국왕은 언제나 해외 순방 중”이라며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대외 활동으로 살아있는 국가 브랜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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