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으로 잘 버티는 한국 시장서 돈 빼 본국으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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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호 04면

미국 경제가 급속히 가라앉고 있는데도 미국 달러가 초강세를 보이는 현상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9월 리먼 브러더스 파산 이후 달러값이 급등했던 것과 비슷하다. 한 나라의 경제가 나빠지면 통화가치가 떨어진다는 경제학 교과서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일본 엔화의 움직임은 더하다.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1974년 1차 오일쇼크 이후 최악으로 떨어졌지만 엔화는 달러를 비롯한 전 세계 주요 통화에 대해 나 홀로 강세를 이어가고 있다.

국내 외환시장 미스터리 미·일 경제 가라앉는데 달러·엔화는 강세 왜?

반면 원화는 급속히 추락하고 있다. 20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가치는 달러당 1506원에 거래를 마쳤다. 지난해 11월 이후 석 달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엔화에 대한 원화가치는 한때 100엔에 1605원까지 떨어지며 사상 최저치를 갈아치웠다. 그렇다고 한국의 경기 침체가 미국·일본보다 훨씬 심각하지도 않다. 기획재정부 관계자가 “외환시장에서 가장 큰 미스터리(수수께끼)”라고 토로할 정도다.

최근 원화 약세에는 동유럽발 금융위기가 한몫했다. 동유럽 국가들의 부도 위험이 커지자 돈을 빌려준 선진국 은행들이 다른 곳에서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금 회수는 주로 한국 등이 속한 신흥시장에 몰린다. 빌려준 돈도 많지만, 아직 신흥시장 증권시장은 그런대로 버텨주고 있어 상대적으로 돈을 빼내기 쉽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국제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수요가 많아졌고 미국계 자금이 본국으로 되돌아가는 흐름도 활발하다는 것이다.

산업은행 경제연구소는 ‘신흥국 위기의 재확산과 원화가치 급락’ 보고서에서 “동유럽 위기로 신흥국에 대한 위험회피 심리가 다른 지역으로 확산하고 있다”며 “이것이 국내 은행의 건전성 및 외화자금 부족 우려를 자극해 원화가치 하락으로 연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석태 한국씨티은행 이코노미스트도 “한국은 외채가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국제 금융시장의 악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며 “최근 원화 하락세는 과도해 보이지만 원화가 다시 안정을 찾느냐는 국제 금융시장의 움직임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엔화 강세에 대해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보고서에서 그동안 일본에서 빠져나온 투자금이 일본으로 되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일본 금융시장에서 낮은 금리로 엔화를 빌려 금리가 높은 나라의 자산에 투자했던 엔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한때 1000억~1조 달러에 달했으나 2007년 말 이후 속속 청산되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빌렸던 엔화를 갚기 위해 엔화를 되사는 수요가 몰렸다는 얘기다. 이는 엔화가 약세에서 강세로 돌아선 시점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국내 외환시장의 수급도 불안하다. 무역수지와 자본수지가 ‘쌍둥이 적자’를 면치 못하는 데다 국내 은행들이 외국에서 달러를 빌리는 사정도 좋지 않다. 아예 돈줄이 말라버렸던 지난해 말보다는 괜찮은 편이지만 경제 위기 이전보다 훨씬 비싼 이자를 물어야만 달러를 빌릴 수 있는 형편이다. 증권 시장에선 외국인들이 9일 연속 ‘팔자’에 나서 이 기간 순매도액이 1조5000억원에 달했다. 외국인들이 주식을 판 돈을 달러로 바꿔 들고 나가는 수요가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은행 쇼크’까지 발생했다. 우리은행은 2004년 2월 4억 달러어치의 10년 만기 후순위채권을 발행했다. 국제 관행에 따라 5년이 되면 갚을 권리(콜옵션)가 생기는데 11일 이 권리를 포기했다. 현재 시점에서 갚고 다시 빌리면 리보(런던 은행 간 금리)에 10%포인트나 더한 고금리를 물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으면 리보에 3.45%포인트를 더한 이자만 내면 된다. 우리은행 입장에선 경제원리에 따라 ‘눈앞의 이득’을 취한 것이니 뭐랄 게 없다. 그런데 이게 국제 금융시장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은행들이 얼마나 (외화조달이) 어려우면 관례를 깨고 채권 만기를 연장했겠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5년 후 원금을 돌려받을 것으로 예상했던 투자자들은 자금이 다시 5년이 더 묶이게 돼 불만이 커졌다. 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우리은행이 민감한 시기에 ‘엉뚱한 짓’을 했다”며 “나라 경제가 어려울수록 작은 이익보다 나라 전체를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13일 신한은행은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9개월이나 앞서 후순위채 콜옵션 행사를 선언했다. 2004년 11월 발행한 4억 달러의 10년 만기 후순위채권을 올 11월에 모두 갚겠다는 것이다.

한국은행도 나섰다. 한은은 19일 예정에 없던 보도자료를 냈다. 한은은 “국내 은행들이 외국에서 빌린 외화자금 중 3월 말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것은 104억 달러, 연말까지는 245억 달러”라며 “2017억 달러(1월 말 기준)의 외환보유액에 비하면 큰 규모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요즘 급속히 퍼지고 있는 ‘3월 위기설’을 일축해 원화가치 하락을 막아보겠다는 의미다.

그러나 외환시장에서는 20일 한은이 발표한 대외채무 현황에 더욱 주목하고 있다. 이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1년 이내에 만기가 돌아오는 외채는 1940억 달러로 전체 외환보유액에 육박한다. 또 외채 총액은 3805억 달러로 지난해 10월 이후 3개월 동안 450억 달러가 줄었다. 오석태 씨티은행 이코노미스트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외채가 급감한 것은 좋은 신호가 아니다”라며 “만기 연장이 어려워 빚을 갚을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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