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주고 간 그분처럼”… 각막 기증 봇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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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 앞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접수 창구에서 정재순씨(왼쪽 첫째)와 전경식씨(왼쪽 둘째)가 기증서약서를 작성하고 있다. [김경빈 기자]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인 전경식(49·인천 부평구)씨는 사흘 내내 서울 명동성당을 찾아 조문했다. 그는 추기경과의 특별한 인연을 떠올렸다. 제주도에서 고아로 자란 전씨는 1989년 제주의 한 목장으로 휴양 온 추기경을 먼 발치에서 한 번 봤다. 그 후 97년 서울 모 병원에서 췌장암 진단을 받은 직후 명동성당을 찾았다가 추기경과 우연히 다시 마주쳤다고 한다. 성당 마당에 있는 성모상 앞에서 울고 있었더니 마침 지나가던 추기경이 “무슨 일이냐”며 다가왔다. 전씨가 “몇 개월밖에 못 산다”고 했더니 추기경은 “희망을 잃지 마라”며 10여 분간 손을 잡고 같이 기도해 줬다고 한다. 행색이 초라해 보였던지 추기경은 “잘 곳은 있느냐”고 물었고 잠시 어디엔가에 다녀오더니 20만원을 쥐어 줬단다. 다행히 암이 아니라 췌장염으로 밝혀졌고 2001년 인천으로 이사했다. 전씨는 2002년 건설 일용직 근로자로 일하다 다쳐 척추장애인이 됐다. 2005년엔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그러다 추기경의 기증 소식을 듣고 19일 각막·장기·시신 기증서를 냈다. 명동성당 앞에 마련된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 접수 창구에는 전씨 같은 기증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19일 한 조문객이 명동성당 에 전시된 김수환 추기경 사진을 만지고 있다. [연합뉴스]

추기경의 각막 기증 이후 전국에서 각막이나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잇고 있다. 온라인으로 기증서를 제출하던 사람이 평소 하루 평균 20여 명에 불과했으나 19일에만 400명이 넘었다. 전화로 기증 의사를 밝힌 사람도 많다. 평소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 서울재단 본부엔 기증 의사를 밝히는 전화가 하루 10통 미만이었으나 최근 며칠 새 30통 이상으로 늘었다. 12개 지역본부와 안구기증운동협회 등도 비슷한 실정이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이지현 팀장은 “명동성당 앞에서 18일 하루에만 100명 넘게 장기 기증서를 받았다”며 “‘추기경님 덕분에 병들고 늙어도 기증할 수 있다는 걸 새로 알게 됐다’고 말한 사람이 많았다”고 말했다.

정재순(60·여·고양시 일산구)씨도 마찬가지다. 정씨는 “2001년 유방암 수술을 받았고 2004년 낙상한 뒤 다리가 불편하다”며 “병든 육체지만 쓸 수만 있다면 누군가에게 주고 싶다”며 각막과 장기, 시신 기증을 서약했다. 아내와 함께 기증서를 낸 이주식(71·서울 중랑구)씨 역시 “쓸모 없는 몸이라 생각했는데 죽은 다음이라도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니 기쁘다”고 말했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로 직접 찾아온 사람도 많다.

이날 장기기증본부 서울재단본부를 찾은 권수연(24·여·고양시 주엽1동)씨는 “장기 기증이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18일 명동성당에서 추기경을 조문한 뒤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가수 장윤정과 서인영·박정아·박현빈 등 연예인 10여 명도 한국인체조직지원본부를 통해 각막 기증에 동참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국내 시각장애인 20만 명 중 2만여 명은 각막 이식을 받으면 시력을 되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난해 사망자와 뇌사자의 각막 기증은 344건에 불과했다. 각막 이식 대기자는 3600여 명이다(국립장기이식센터). 2000년 이후 미국 등지에서 비싼 가격에 각막을 수입하고 있다. 2007년에 330여 개가 수입됐다.

안혜리·김은하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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