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만화 보고 욕하는 댓글도 재미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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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도 안다. 순정만화에 등장하는 각종 공식들이 진부하기 그지없다는 사실. 평범한 여주인공(그러나 가벼운 화장만으로 눈부신 미모로 변신해 주시는)이 완벽한(그러나 공허한 영혼을 가진) 남자 주인공을 만나, ‘나를 이렇게 막 대하는 여자는 처음이야’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그의 마음을 얻는다는 식의 스토리. 성패는 이 ‘뻔한 이야기’를 어떻게 ‘뻔하지 않게 풀어내는가’에서 갈린다. 그런 의미에서 만화가 원수연(48)씨는 여자들의 환상을 자극하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가장 맛깔나게 그려내는 한국순정만화계의 대표주자다.

40대 후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발랄한 외모의 원수연 작가는 “나이 들수록 순정만화를 그리기 힘들어지지 않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데, 아직도 내 안에는 그리고 싶은 사랑 이야기가 그득하다”고 말했다. [김도훈 인턴기자]


드라마로 만들어져 아시아를 열광시킨 ‘풀 하우스’의 속편을 발표한 후 한동안 작품활동을 쉬던 그가 포털사이트 다음(www.daum.net)에 새 만화 ‘매리는 외박중’을 연재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순정만화 팬이라면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뉴스. “3년간 살림과 육아에 전념하다 보니 하고 싶은 얘기가 마구 솟아나더라”는 그를 만났다.

◆환상적인 그림, ‘역시 원수연’=‘매리는 외박중’은 현재 4회까지 공개됐다. 여주인공 매리가 남자 주인공 중의 한 명인 무결을 마주치게 되는 부분까지가 전부다. 적은 분량에 비해 네티즌의 반응은 열광적이다. 1화가 공개된 후 3일간 집계된 클릭수가 25만 건, 댓글도 1화에만 500개가 넘게 달렸다. “잡지나 단행본에 비해 작품에 대한 반응이 빠르다는 게 신기하더라고요. 주변에서는 ‘상처받으니 댓글은 절대 읽지 말라’고 하는데 저는 재미있어요. 좋아해 주시는 분들을 보면 감사하고, 욕하는 글에는 ‘아 내 만화가 이렇게 보이는구나’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되고….”

스토리에 대해서는 “기대된다”는 호평과 “뻔한 전개”라는 혹평이 엇갈리지만, 그림에 대해서는 “역시 원수연”이라는 감탄이 대부분이다. “오랜만에 순정만화 남자 주인공을 보며 가슴이 철렁했다”는 여성들도 많다. “10대 시절에는 순정만화에 깊이 빠졌었지만 언젠가부터 순정만화를 읽지 않게 된 20~30대 여성들이 제 만화를 봤으면 좋겠어요. 그들과 소통하는 세련된 작품을 그리는 것이 이번 목표입니다.”

◆순정의 매력, 웹에서도 지키고 싶어=원수연씨는 한동안 웹툰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포털 사이트에 처음 만화가 연재될 당시 ‘아직도 만화를 돈내고 보십니까’라는 슬로건에 만화가로서 모욕감을 느꼈던 탓이다. 그러나 기성 작가들이 망설이는 동안 신인 작가들이 웹에서 좋은 작품을 쏟아내는 것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인터넷을 만화라는 장르가 새롭게 판을 펼 수 있는 또 하나의 매체로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발상의 전환에는 인기 웹툰 ‘위대한 캣츠비’를 그린 남편 강도하씨의 역할도 컸다.


웹 연재라는 방식을 택했지만 순정만화가 지닌 고유 특성을 망가뜨리지 않겠다는 원칙은 분명하다. “순정만화에는 나름의 호흡이 있어요. 여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려면 적절한 쉼과 여백이 필요하죠. 웹툰이 가진 속도감만 추구하다 보면 그 매력이 살아나질 않아요.” 요즘엔 새 작품을 그리는 틈틈이 새롭게 드라마화되는 ‘풀하우스2’의 대본 작업에도 조언을 해 주고 있다.

“‘스토리의 힘’이 중요하다는 걸 ‘풀 하우스’의 성공을 통해 절실히 느꼈어요.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계속 살아 숨쉬고 있다는 생동감이 무척 짜릿하더라고요.”

이영희 기자 , 사진=김도훈 인턴기자

◆원수연은=1961년생. 87년 장편만화『그림자를 등진 오후』로 데뷔했다. 작가 지망생과 톱스타의 사랑을 그린『풀 하우스』는 2004년 비와 송혜교 주연의 드라마로 만들어져 국내는 물론 일본·홍콩·태국 등 아시아 전역에서 큰 인기와 성공을 거뒀다. 그 외 작품으로는『엘리오와 이베트』『렛 다이』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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