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세 후보 경제비전 모호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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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3당 대통령후보가 모두 자유화.개방된 시장경제제도의 정착과 이를 위한 과감한 규제완화.철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론의 제시는 국민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국민은 그동안 무엇이 잘못돼 아직도 자유시장제도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으며, 만일 새로운 제도가 뿌리를 내리면 현재 한국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이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를 알고 싶어한다.

경제자유화를 위한 제도개편이 무리없이 추진되려면 일반국민의 제도개편에 대한 이해와 지지가 있어야 한다.

재벌과 대기업도 과거의 제도에 안주하면서 기득권에만 집착하려는 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동시장의 경직성도 완화돼야 하며, 자유화.개방으로 피해를 보게 될 계층과 집단의 저항도 무마해야 하고, 무엇보다 정부의 기능과 조직이 개편돼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개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이 등장해야 한다.

그러면 현실은 어떤가.

대부분의 국민은 자유시장제도가 어떠한 변화와 이득을 가져올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런가 하면 경제의 자유화.개방을 적극적으로 요구해 왔던 재벌과 대기업은 경영혁신이나 구조조정은 뒤로 미루고, 그들에게 유리한 규제나 통제는 외면한채 어려울 때면 정부의 지원이나 처분만 기다리고 있다.

그토록 강력히 정부의 규제를 반대하던 대기업들이 정부가 알아서 부실기업을 정리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면 시장경제의 정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자유시장경제에서는 노동시장 또한 수요와 공급에 따라 임금과 고용수준이 결정될 수 있도록 유연해져야 한다.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바로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금융을 비롯한 여러산업에서 구조조정을 가로막고 있으나 노사 어느 한편도 쉽사리 양보할 준비가 돼있지 않고 정치권은 눈치만 보고 있지 않은가.

시장개방으로 고용이 불안정하게 되며 숙련.비숙련 일반근로자간의 임금격차가 심화되고, 노동시장에서 온정주의가 사라지고,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급속히 쇠퇴할 것이 분명하다.

또 재래시장이 사라지고 영세 도소매상이 대규모 체인에 흡수되고 있으며 경쟁력이 없는 부문, 특히 서비스업의 많은 중소업체가 도산위기에 몰릴 전망이다.

따라서 이처럼 피해를 보는 여러 계층에 대한 보상이나 지원없이 자유화.개방이 순탄할 리 만무하다.

경제의 자유화.개방이 부진한 책임은 결국 많은 부분 정부에 돌려진다.

정부는 규제완화와 시장개방으로 정책수단과 영향력을 상실해 과거와 같이 경제운영을 주도할 수 없게 되고 있는 이상, 이와 같은 현실을 받아들여 앞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 조직과 기능을 정비하는 등 자유화의 의지를 분명히 전달했어야 한다.

외국의 경험을 보면 경제의 자유화.개방에 따라 정부의 사회보장적인 역할과 책임이 더 커지게 된다.

왜냐하면 자유화의 고통을 공평하게 분담시키지 않는한 계층간 갈등이 심화돼 자유화를 위한 제도개편 자체가 벽에 부닥치게 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들 피해.낙오 계층의 보호를 위한 개입과 지원의 한계와 범위를 설정하고, 지원에 필요한 재원조달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대기업.중소기업.근로자 모두 문제가 있을 때마다 정부만 쳐다보고 있다.

끝으로 규제를 철폐한다고 해서 자유시장제도가 하루아침에 저절로 형성되지는 않는다.

자유시장경제가 많은 경제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특히 시장참여자들간의 상호신뢰와 정확한 정보교환을 시장형성의 필수요건으로 하는 금융 시장은 가격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작은 충격에도 쉽게 흔들리는 불안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부실기업의 정리와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처리를 시장에 맡겨놓을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국민은 대통령후보들로부터 경제의 자유화.개방의 걸림돌을 무리없이 제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과 시장의 역할에 대해 좀 더 현실적이고 균형된 감각을 보이는 경제비전을 제시하길 원한다.

박영철,고려대 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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