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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에메랄드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9면

밤 열한시가 가까워지는 시각, 하영과 나는 발코니에 앉아 있었다.

섹스와 다시 한번의 샤워, 그리고 성적인 긴장감이 지나간 뒤의 망연한 평온함이 그녀와 나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것 같았다.

원근으로 내다보이는 모든 것들이 왠지 모르게 무위롭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끊임없이 다리를 건너가고 건너오는 차량의 행렬 밑으로 묵묵히 흘러가는 강, 그 먹빛 수면밑에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깊고 깊은 밤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날카로운 은유처럼 번들거리는 수면의 불빛, 그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을 향한 질타이거나 힐난의 말로 오래전부터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너희들, 인생이 뭔지 알고나 사느냐?

한동안 말없이 앉아서 밤풍경을 내려다보던 하영이 커피를 마시겠느냐고 문득 나에게 물었다.

그러마고, 담배를 피워물며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젖은 듯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가는 희끄무레한 봄밤, 고개를 들고 허공을 올려다 보았지만 별은 보이지 않았다.

뜨거운 두 잔의 커피가 녹색테이블 위에 올려지기 전, 귀에 익은 슈베르트의 소나타가 실내에서 먼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뒤에 작은 쟁반을 손에 든 하영이 다시 발코니로 나왔다.

"저녁무렵부터 커피를 마시고 싶었는데, 이제야 마시게 되네요. " 머그잔 하나를 내 앞으로 건네며 그녀가 말했다.

"이건, 그래도 명목이 있는 커피로군. " "명목이라뇨?" 머그잔을 입술에 댄채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정사가 끝난 뒤의 커피잖아. " "그럼 좀전에 태운 담배는 정사가 끝난 뒤의 담배인가요?" "그래, 예전에 그런 제목의 샹송이 있었는데…영화주제가였던가, 잘 모르겠어. 아무튼 '정사가 끝난 뒤의 담배' 였어. " 그녀와 나는 다시 밤풍경을 내려다보며 뜨거운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정사가 끝난 뒤의 담배, 정사가 끝난 뒤의 커피, 그리고 정사가 끝난 뒤의 침묵…세상은 밤을 배경으로 한 무언극의 무대처럼 그녀와 나로부터 아주 먼 곳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세상의 가속력에서 튕겨져 나왔지만, 이제 두번 다시는 그것을 좇아가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그녀와 나는 잠잠한 침묵으로 정사가 끝난 뒤의 평온을 즐겼다.

"우리는 평생을 이런 식으로 사는 건가요?" 어는 순간인가, 머그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차분한 음성으로 그녀가 물었다. 박상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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