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비현실적 규정 폐지등 법률 재정비 시급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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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법은 행정의 기준이자 근원이다.

따라서 법이 시행 가능하려면 당연히 합리적이고 체계적이어야 한다.

잘못된 법이 넘칠 때 '법대로의 행정' 은 모순과 부조리의 악순환에 말려들게 된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 주위에서는 '잘못되고 낡은 법' 의 사례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95년 12월29일 제정된 '중소기업의 구조개선및 경영안정 지원을 위한 특별조치법' 에는 전국 6백여 재래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한 시장재개발.재건축 규정이 있다.

침체에 빠져있는 재래시장을 살리기 위해 자금을 지원한다는 규정이다.

그러나 재래시장은 도시재개발법과 건축법의 적용을 받게 돼있다.

그런데도 정작 그 두 법에는 '시장재개발.재건축' 에 대한 규정이 없어 모처럼 제정한 특별법이 허공에 떠 버렸다.

문제가 있음을 안 당국은 법제정 후 1년도 안돼 개정했지만 '이 법에 정하지 않은 사항은 도시재개발법.주택건설촉진법등에 따른다' 라고 막연히 정해 역시 쓸모없는 법이 돼버렸다.

도시재개발법상에는 시장재개발구역은 지정조차 할 수 없도록 돼있기 때문이다.

결국 1천억원대로 편성한 지원예산은 쓸 데가 없어 낮잠을 자거나 변칙운영될 위험에 처해있다.

재래시장 상인들은 정부시책을 믿고 전국기구까지 구성했으나 단 한곳도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법령 대조를 위한 CD롬 타이틀 개발과정에서 법 조문을 비교한 결과 참조할 법조항이 삭제됐거나 아예 없는 오류가 2백30건이나 발견됐다.

2천5백여개에 달하는 시행령.시행규칙과 자치법규인 조례까지 포함할 경우 이런 오류는 수천건이 될 것으로 추정돼 법 운영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많은 법규중에는 법끼리 상충하거나 상위법과 하위법이 서로 위반하는 경우, 법적용대상이 없거나 계획규정은 있지만 시행규정이 없어 쓸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급격히 변하는 환경에 적용할 새로운 법은 부족한 반면 구시대적 낡은 법이 법전을 채우고 있어 경제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법으로 국제경쟁이나 세계화를 꿈꾼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다.

앞으로 고속철도 사업을 두고 우리와 프랑스가 어떤 마찰을 빚게 되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런데도 최근 국회는 72개 법안을 토론 없이 20여분만에 통과시켰다.

법이 10여초에 1건씩 마치 빵틀에서 붕어빵이 튀어나오듯 숨막히게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이를 두고 '입법 문화의 실종' 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대선후보들은 정치.경제.사회등 모든 분야의 개혁을 주장하면서도 제도 창출의 바탕인 입법개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바라건대 대선후보들과 정당들은 지금의 낡은 법을 어떻게 정비할 것이며, 형식적인 공청회.입법예고.법안심의제도등을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등 입법문화를 쇄신하는 방안과 의지를 공약으로 제시해야 할 것이다.

전기성[한국행정법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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