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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포커스]'엔貨경제권'은 현실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일본이 가진 가장 큰 무기는 엔화의 엄청난 영향력이다.

지난 한달 사이에 페루와 루마니아 대통령이 잇따라 일본을 방문해 엔차관을 선물로 받아갔고, 독일 대통령, 러시아의 경제담당 부총리, 영국의 장관들이 도쿄 (東京) 순회시 엔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자국PR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미국 지도자가 일본을 위협하며 보호주의적 조치를 취하면 일본은 미 재무부 증권구입을 중지하고, 세계 통화시장에서 달러의 목을 죄는 보복조치로 맞설 수 있다고 은근히 상기시켜 왔다.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총리가 최근에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화 매매를 통해 대미 (對美)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발언을 한 이후 워싱턴이 잠잠한 것은 역시 엔화의 위력이 어지간하다는 것을 웅변으로 설명하고 있다.

일본이 엔화로 사들인 미국 국채의 총액 (잔액 기준) 은 무려 3천억달러에 이르고 있다.

동남아국가연합 (ASEAN) 일부 국가들의 주요 통화를 위기로 몰아넣은 '악한' 으로 지목받고 있는 미국의 투자가 조지 소로스도 엔화의 급부상을 주목했다.

일본 경제활동의 독무대가 된 ASEAN 국가, 특히 그중에서도 우등생 경제국가로 알려졌던 태국에 이어 필리핀 통화가치가 떨어지고 시장에 큰 혼란이 일어나자 두 나라 정책당국자들이 일본에 구원을 요청함으로써 엔화의 정책협조 방안과 지도적 역할에 궁금증이 몰리기 시작했다.

통화위기가 한때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홍콩및 한국에까지 파급되면서 일본에서는 이들 국가의 환율제도 개선에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거의 모든 아시아국가들은 대일 무역거래 규모가 미국보다 훨씬 크거나 비슷한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환율은 달러화 시세에 따라 결정되는 달러연동제를 채택하고 있다.

지난 2년 사이에 달러당 엔화 시세가 40여%나 떨어지면서 각국의 가격경쟁력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통화시장도 여전히 불안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돈 값은 어차피 그나라 경제실력에 따라 매겨진다.

경제기반이 약해지면 통화가치는 떨어지고 엔화의 지배력이 상대적으로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을 포함한 많은 아시아국가들의 문제는 갈수록 일본에 더 의존적인 체질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무역거래가 그렇고 기술을 포함한 각종 서비스가 그렇다.

정보 의존도는 또 어떤가.

일본과의 거래에서 아직 흑자를 본 아시아 국가는 거의 없다.

일본이 아시아의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66%나 된다.

기술적 우위에 따라 서태평양 경제권까지 견인차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가만두어도 모두 엔 영향권에 들어가는 과정을 밟게 된다.

그래서 몇몇 경제학자들은 일본이 엔 경제권을 만드는게 아니라 저절로 만들어질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일본의 입장에선 하고싶은 얘기가 있을 것이다.

일본이 세계 제1의 채권국이 되었는데도 세계 제1의 채무국인 미국의 달러화로 대외자산을 운용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적 전례가 없는 처사라는 것. 걸프전 (戰) 때 미국은 하이테크 병기로 군사력 1위를 자랑했지만 전쟁비용은 일본등 해외에서 지원받았다.

금융시장에서 달러 붕괴 위기를 맞은 것도 그때다.

미국은 군사력을 가졌지만 일본은 금융력으로 무장하고 있다.

엔화는 일본의 힘이며 국력이고 자존심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과거의 강대국이었던 러시아가 엔 투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굽실거리는 모습을 볼 때 '돈은 모든 것을 말한다' 를 실감하게 된다.

일본은 아시아주의를 내걸고 있는 ASEAN에 오랫동안 경제.외교력을 집중해 왔다.

일본 문화의 수출도 대단한 규모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일본 정부 내부에서 비공식적으로 검토돼 왔던 '엔 경제권' 구상이 어떤 모습으로 다듬어질 것인지 자못 관심거리다.

그것이 과거 아시아인의 신경을 자극했던 전전 (戰前) 의 대동아 (大東亞) 공영권 구상은 결코 아닐지라도 21세기형으로 모양이 갖춰질 것이다.

한국은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

<최철주 일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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