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국회 10여초만에 법안 한개 '뚝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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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법 (法) 하나 만드는 데 10여초.

김수한 (金守漢) 국회의장은 국회 폐회일인 30일 오후8시25분부터 약 20여분간 무려 4백30여번 방망이를 두들겼다.

"의사일정 제1항 성폭력처벌 특별법에 관한 개정안을 상정합니다" "땅 땅 땅" "이 안건에 의의 없으십니까. 이의없으시면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땅 땅 땅" .金의장이 "이의 없느냐" 고 외칠 때마다 여야 의원석에선 장난처럼 "없습니다" "없어요" 하는 대답들이 터져나왔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직결돼 있는 법안들이 건당 10여초 정도만에 전부 번개같이 통과됐다.

金의장은 이런 식으로 72개의 법안과 1개의 동의안을 포함해 모두 73개의 의안을 20여분 동안에 다 통과시켰다.

…이날의 법안 무더기 통과는 여야 합작품이었다.

金의장은 이같은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듯 "원래대로 하자면 법안에 대한 제안설명과 심사보고도 해야 하지만 시간이 없는 관계로 유인물로 대체하겠습니다" 라고 말한 뒤 일사천리로 방망이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마구잡이로 법안을 읽어대며 통과시키다 보니 어처구니 없는 일도 속출했다.

金의장은 '여신전문 금융업법안' 을 '흥신전문…' 이라고 읽다가 정정했다.

의사일정 49항을 48항이라고 하는가 하면 사무처 직원들에게 "다음이 뭐야" 하고 묻는 내용이 그대로 마이크를 타고 국회방송에 전달됐다.

金의장은 부리나케 방망이를 두들기기 시작한지 10여분만에 잠시 물을 마셨다.

그는 의원들을 향해 "사회봉에서 너무 열이 나서" 라며 멋쩍게 웃었다.

金의장은 제출된 법안에 반대하는 의원들에 대해서도 "서면답변으로 대신하자" 고 넘어갔다.

그래도 아무런 반발이 없었다.

법안이 통과되는 동안 의원들이 보여준 태도도 가관이었다.

대부분은 법률안이 적힌 보따리를 풀어보지도 않았다.

국민회의 조홍규 (趙洪奎) 의원은 金의장이 방망이에 열이 난다고 하자 "의장님 왼손으로 두들겨요" 라고 농담을 해댔다.

신한국당 김호일 (金浩一).서정화 (徐廷和) 의원은 법안이 통과되는 동안 일어서서 회의장을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녔다.

오후8시47분 거사를 끝낸 金의장은 "의원님들, 정말 수고했다" 고 말했다.

"의장님도 수고했어요" 라는 고함이 터져나오자 김의장은 의장석에서 손을 흔들었다.

제헌의회 이래 아마도 최대 기록일 것이고 기네스북에 올라도 될 방망이 두들기기는 이날 이렇게 이뤄졌다.

…여야는 30일에도 정치개혁특위 문제로 격돌했다.

선거법.정당법등이 걸린 문제고 연말 대선을 앞두고 있어 한치도 양보가 없었다.

여당은 특위구성을 의석비율로 하자고 했고, 야당은 여야 동수가 돼야 한다고 맞섰다.

협상은 하루종일 냉.온탕을 오갔다.

오후의 1차 총무협상에선 대략 합의안에 도달했다.

"특위 위원은 18명, 구성비율은 여야 합의. 8월7일까지 구성비율에 합의하지 못하면 무효" 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합의는 곧 뒤집혔다.

국민회의 의총이 "여야 동수 특위구성을 명문화해야만 한다" 는 강경론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비교적 온건하던 자민련도 공조 (共助)에 묶여 끌려갔다.

국민회의의 숨은 뜻은 8월초에 다시 임시국회를 열어 신한국당 이회창 (李會昌) 대표의 아들 병역문제를 계속 걸고 넘어가겠다는 것으로 해석됐다.

신한국당 박희태 (朴熺太) 총무는 이때부터 야당 의원들을 개별 접촉해가며 "당초 합의를 지키라" "명예를 걸고 정치개혁특위안을 단독으로 처리하지 않겠다" 며 설득에 나섰으나 마이동풍 (馬耳東風) 이었다.

다급해진 신한국당은 오후7시를 전후해 긴급 고위당직자 회의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李대표가 "민생법안이 더 중요하니 동수특위를 받아주자" 고 제안했다.

잇따라 열린 의총에서도 李대표의 이런 제안이 만장일치로 받아들여졌다.

여야는 오후8시를 넘겨서야 본회의를 속개했고 70여개 법안들을 일사천리로 통과시켜 임시국회 마지막날의 파국을 가까스로 넘겼다.

김종혁.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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