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막드? 미국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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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한국에서 ‘막드(막장 드라마)’가 유행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소위 요즘 제일 잘나가는 막드라는 ‘아내의 유혹’을 몇 회 시청했다. 한 여자가 자신의 삶을 파괴시킨 남편에게 복수한다는 설정 자체는 있을 법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하도 황당해 결국 막드라는 불명예를 안은 듯하다.

한국식 막드의 문법은 크게 두 가지다. 지나치게 선정적인 내용, 그리고 억지스러운 설정의 남발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는 불륜이고 후자의 대표적인 예는 출생의 비밀이다. ‘아내의 유혹’도 이 두 가지 요소를 배합해 끊임없이 갈등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아무리 막나가는 막드도 웬만한 ‘미드(미국 드라마)’에 비하면 양반이다. 간단한 예로, 된장녀의 교과서라는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는 30대 중반의 여자 네 명이 모이기만 하면 섹스를 논하는 드라마 아닌가.

미혼 여성의 성생활이야 누가 뭐라 할 수 없는 문제라 치고, 그렇다면 ‘위기의 주부들(Desperate Housewives)’은 어떤가. 유부녀들의 일탈을 대놓고 표방하는 이 드라마에는 거짓말, 불륜, 매춘, 방화 등 선정적인 소재가 총출동한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공중파 ABC에서 제작·방영됐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미드 막장의 지존은 ‘닙턱(Nip/Tuck<20A9>사진)’이 아닐까 싶다. 주변의 여느 미드 폐인에게 물어봐도 ‘닙턱’이 최강 막장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자르고(Nip) 쑤셔넣다(Tuck)는 뜻의 제목을 가진 이 드라마는 두 성형외과 의사가 주인공이다. 역한 수술 장면은 둘째치고 그 선정성과 엽기성의 수위가 상상을 초월한다.

가령 남녀의 정사 장면 정도는 예사다. 주인공끼리 서로의 아내와 애인을 번갈아 탐하는 식이다. 최근 시작한 시즌 5-2에서는 호색한인 주인공이 남자유방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밤에는 거리의 여인을 집으로 불러들인다.

양국의 정서적 차이를 무시하고 두 나라의 드라마를 일대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미드에 비하면 ‘아내의 유혹’은 귀여운 수준이 아닌가 싶다. 오히려 문제는 세월이 지나도 발전이 없는 뻔하디 뻔한 소재다. 한국식 막드는 철저히 불륜의, 불륜에 의한, 불륜을 위한 드라마다.

그에 비해 미드는 의학이나 법률 등 핵심적인 소재를 다루되 흥미 유발을 위해 선정성이 가미되는 식이다. 똑같이 막드인데도 한국 드라마가 유독 욕을 먹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처럼 불륜을 주 재료로 출생의 비밀이나 불치병과 같은 뻔한 양념 몇 가지만 첨가하면 끝이다.

어차피 다큐멘터리가 아닌 이상 드라마에는 억지스러운 설정이 가미되게 마련이다. 현실이라기보다 판타지라고 생각하면 황당한 설정도 그럭저럭 관대하게 넘어갈 수 있지만, 불륜이 아니면 할 이야기가 없는 드라마 작가들의 빈곤한 상상력이 아쉽다. 이제는 좀 우리도 의학 막드, 범죄 스릴러 막드, 코미디 막드 등 불륜 말고도 골라보는 재미가 있는 막드를 기대할 수는 없을까.

김수경


김수경씨는 서울대 인문대를 졸업하고 일간지에서 문화부 기자로 근무했다. 현재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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