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광복절특집 '아! 관동대지진' 日여배우 리포터로 참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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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우리는 관동대지진을 잘 모른다.

23년 9월1일 지진이 도쿄 (東京) 일대를 폐허로 만든 뒤 '센징 (조선인) 이 우물에 독을 탔다' 는 소문이 퍼지며 6천여 조선인이 처참히 학살당한 이 참극이 고교 교과서에는 그저 석줄로 짤막하게 언급돼 있을 뿐이다.

학계의 연구도 없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강만길 (64) 교수는 "내가 기억하는 한 관동대지진에 대한 국내 연구논문은 단 한편도 없다" 고 말할 정도다.

그래서 당시의 참상을 되새겨 보는 SBS의 광복절 특집 다큐멘터리 '아!

관동대지진' (8월15일 밤8시55분) 은 의미를 갖는다.

지난달 말 열흘동안 학살의 흔적과 증언을 찾아 도쿄 일대를 누빈 SBS 제작진에는 일본인 중견 여배우가 끼어 있었다.

"70년대말 재일 한국인에 대한 부당한 처사에 분노를 느끼고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게 됐다" 는 그는 구로다 후쿠미 (黑田福美.41) 였다.

<본지 4월8일 46면 참조> 일본인이 한국의 광복절 특집 다큐멘터리 리포터를 맡은 것도 이채롭지만 그가 여기에 참여를 순순히 승락했다는 것도 흥미롭다.

관동대지진의 학살은 일본의 부끄러운 역사. 한국을 좋아한 나머지 한국어도 유창하게 구사하게 됐고 또 1년에도 몇차례씩 한국을 찾는다지만 일본의 치부를 드러내는 작업에 왜 일본인인 구로다가 나섰을까. "고교시절 한 선생님의 말씀때문이죠. " 25년전 어느날. 세계사를 가르치던 히하라선생이 말을 꺼냈다.

"교과서에는 없지만 너희들은 이 사건을 알아야 한다.

" 그 말과 함께 학생들에게 나누어준 자료에는 관동대지진의 참극이 씌어 있었다.

한 목수가 끌과 창으로 조선인을 살해하고는 '해치웠다' 고 묘한 만족감을 표시한 내용이 담겨 있었고 이는 한 소녀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난해 여름 윤동혁제작위원이 " '아!

관동대지진' 의 리포터 역할을 맡아달라" 고 요청했을 때 구로다는 그 충격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곤 제의를 선뜻 받아들였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동안 구로다는 학살의 현장을 확인하고 지진 당시 일본인에 잡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 (85년 사망) 의 부인을 만났다.

현장을 목격한 일본인으로부터의 증언도 들었다.

"속상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조선인 희생자들이 묻힌 아라카와 강변을 발굴하는 것은 물론 그곳에 위령비를 세우는 것조차 허락해주지 않더군요. " 그나마 구로다가 위안을 얻은 것은 일부 일본 민간인들이 사죄와 반성의 의미로 아라카와 강변에 봉선화를 심고 매일 가꾸는 것. 또 그 수가 적긴 하지만 당시 학살의 진상을 파헤치려는 고교시절 히하라선생 같은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있다는 것. 구로다는 일본인임에도 침략을 숨기는 일본의 교과서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조상들의 잘못된 과거를 알아야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참된 뉘우침을 보여야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나라가 될겁니다.

저도 한국인들에게 사죄하는 의미로 이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고 있습니다.

"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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