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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경, ‘선 책정·후 검증’이 중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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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한국은행이 어제 기준금리를 2.5%에서 2%로 0.5%포인트 낮추었다. 0.25P%냐, 0.5%P냐 설왕설래했지만 현재의 급격한 경기 악화를 고려할 때 시장의 일반적 기대 수준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실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이란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우물쭈물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한은이 지난해 10월 금리인하를 시작하면서 불과 4개월여 만에 5.25%에서 2%로 낮춘 것은 대단한 변화다. ‘유동성 함정’에 빠지기 전까지는 경기 상황에 맞춰 금리정책을 펴야 되지 않느냐, 금리인하와 양적(量的) 완화라는 금융적 수단이 재정과의 정책 조합을 거스르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 대응한 면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지만, 매사 그렇게 삐딱하게 볼 필요는 없지 싶다. 하지만 여타 주요국이 제로금리에 다가섰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우리가 갖고 있던 이점이 이번 조처로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점은 분명히 생각해야 한다.

이럴 때 더욱 중요한 것이 또 다른 한 축인 재정정책이다. 이번 주 출범한 새 경제팀이 가장 먼저 분명히 한 것이 예상보다 빠른 경기후퇴, 그리고 그에 대응하기 위한 추경예산 편성의 필요성이었다. 세세한 통계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고용을 비롯한 수출·투자·소비 등 경제지표는 급전직하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유효수요의 부족을 메우기 위한 재정확대의 필요성은 적잖은 이견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택하듯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정부도 이달 말까지 필요한 부문과 소요 액수를 산정해 다음 달까지는 확정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추경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대체로 공감대가 이뤄졌다고 보지만 몇 가지 반론이 눈에 띈다. 아직 올 예산 집행도 멀었는데 웬 선떼기냐, 추경보다는 뭐에 필요한지부터 따져보는 게 순서 아니냐, 재정건전성 악화는 어쩔 거냐는 등등의 논리다. 물론 올 들어 예산 집행속도가 빨라졌다고는 하지만 현장 단계에서 그 속도를 느끼기에는 다소의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그렇다 해서 그 속도와 효과를 보고 하자? 일반적으로 옳지만 현 상황에선 자칫 사후약방문이다. 뭐에 쓸 것인지부터 생각하자? 당연하다. 이 질문에 깔려 있는 기본적 불신은 중앙이든 지방이든 예산을 요구해 가져다 쓰는 정부는 반쯤 도둑놈이란 것이다. 그런 평판을 듣게 된 요인이 없지 않겠지만, 이 문제는 당연히 이뤄졌어야 할 결산 문제의 소홀함을 다시 일깨워줄 뿐이다. 재정건전성은 물론 조심해야 할 문제지만 위기 상황에서 재정 투입을 늘리는 것도 정부의 당연한 책무다. 우리의 재정건전성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훨씬 나은 것도 물론이지만 그동안 나라 살림의 대차대조표를 볼 때 우리는 기본적으로 재정의 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지난해 경제가 어려웠던 시절에도 4조6000억원의 세계잉여금이 생겼고, 9조원 이상의 감세를 감안하면 실질 규모는 10조원을 훌쩍 넘는다. 올해 추경 규모가 확정되지 않았지만 부가세를 포함한 기본 세제에 손을 대지 않고, 세제개편을 경기 대응이 아닌 제도 불합리 개선에 맞추며, 일부 대응적 감세에는 일몰 조항을 분명히 정하고, 앞으로 경기가 정상화되어 생길 세계잉여금을 원칙적으로 국채 상환만 쓴다는 식의 용처만 분명하다면 20조원 추경을 못할 게 없다. 필요한 시점에 추경을 해야 한다는 것도 갑작스러운 천재지변 같을 때 하는 얘기지, 요즘 같은 위기 상황에선 외려 시기를 앞당겨 의지를 보이고 기술적으로는 국채 발행 시점을 적절히 분산하는 기회를 갖는 것도 주요 카드가 될 수 있다.

1999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외환위기로 일본도 몇몇 중견 금융기관이 무너지며 경기침체 기미를 보였던 적이 있다. 당시 일본 내각이 재정악화 때문-일본으로선 당연했다고 할 수 있지만-에 미적거리던 몇 달 새 경제는 더 심하게 무너지고 결국 대규모 추경 편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때가 기억난다. 바로 그 서너 개월의 머뭇거림이 일본의 경기침체를 1년여 지속시켰다는 것이 이후 일본 내부의 반성이었다.

현실이 간단치 않다. 이제 누구도 추경의 필요성 자체에 대해서는 토를 달지 않는 분위기다. 다만 어디다 쓸 거냐, 언제 얼마나 할 거냐 하는 문제들이 남아 있다. 새 경제팀이 초안을 내놓고 그 규모와 용처를 제대로 따져 묻되 큰 줄기를 헤아리는 국회를 보고 싶다. 현 시스템상 국회의 판단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면 중앙정부건 지방정부건 용처와 기대효과를 분명히 밝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국회 예결위가 분명히 심사하든지, 자신이 없다면 전문적 하부기구를 만들든지, 감사원에 행정감사를 위임하든지 명확히 판단하는 게 옳다. 그리고 그 결과 불가피한 상황 변화가 아닌 의도적 조작 행위에 대해선 행정·사법적 책임을 묻는 것, 이런데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박태욱 경제담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