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뮤지컬 대본 쓴 의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양혜란(37·사진)씨는 의사다. 서울대 의대 조교수로, 현재 분당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진료와 강의에다 최근엔 논문 마감에도 쫓기고 있다. 이렇게 빠듯한 일상에도 그의 이름 앞엔 또 다른 직함이 붙어 있다. 뮤지컬 극작가다. 그는 국악뮤지컬 ‘러브 인 아시아’란 작품의 극본과 가사를 직접 썼다.

“그냥 제 경험과 상상을 편안하게 늘어 놓았을 뿐인데….”

아이들과 오래 생활한 덕일까. 아주 쉬운 단어를 골라 썼고, 말투는 조근조근하고 상냥했다. 의사가 그냥 재미삼아 한번 써본 뮤지컬로 치부하기엔 작품에 대한 관객의 반응이 꽤 뜨겁다. 작품은 2007년 초연됐다. 호평이 이어지자 지난해엔 국립극장에서도 공연됐다. 올해엔 전국 투어에 나선다. 21일 서울 공연을 시작으로 3월 말까지 거창·포항·강릉 등 11개 도시를 순회한다. 어지간한 프로 극작가도 누리기 쉽지 않은 인기다.

이 작품은 다문화 가정을 다뤘다. 배경은 전남 고흥. 유교사상이 강한 종갓집이건만 세 아들은 각각 필리핀·옌볜·베트남 여성과 결혼해 살고 있다. 어머니는 서울로 유학 간 딸만큼은 한국 남자와 짝을 이루길 바란다. 딸이 결혼할 사람이라며 대학 강사인 남성을 집안 어른들에게 소개하기로 한다. 집은 갑자기 잔치 분위기다. 그런데 막상 딸이 데려온 이는 흑인 남성이다.

작품은 24시간 동안 벌어지는 사건과 갈등이 축이다. 세 며느리의 남다른 사연도 소개된다. 다양한 해프닝 속에 코믹한 요소도 적지 않다. 마지막엔 찡한 장면도 있다.

“요즘 환자 중에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부쩍 늘었어요. 제가 일을 나가는 통에 집에서 아이들 봐주는 아줌마도 옌볜 분이고요. 이런저런 제 경험담을 구성한 거죠.”

단순히 경험을 직조해 놓은 실력치곤 내공이 탄탄하다. 양씨는 전남 함평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별명이 ‘책벌레’였단다. 동화·과학서적 등 닥치는 대로 읽었다. 셰익스피어와 모파상 전집도 독파했다. 문화적 혜택이 적은 환경이었기에 고교 때 본 연극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연극을 보자마자 집으로 돌아와 하루 만에 단편 소설 한 편을 쓰기도 했단다.

“전형적인 문학 소녀였죠. 작가가 꿈이었고. 하지만 현실은 제 꿈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더군요.”

글쓰기에 대한 열망은 의대 진학과 함께 자연스레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그걸 다시 툭 건드린 건 남편 김창곤(41)씨다. 국립국악원 정악단 부수석인 김씨가 “국악뮤지컬 공모가 있는데, 자기가 한번 써보지?”라며 권유를 한 게 출발점이었다.

“뮤지컬도 모르고, 국악도 모른다며 처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이미 손은 떨리고 있던 걸요.”

첫 작품의 성공을 발판으로 차기작도 준비 중이다. 4월에 무대에 오르는 ‘행복동 고물상’이다. 노인 문제를 풍자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의사일만도 만만치 않을 텐데, 극작가 일을 병행하는 건 어떨까.

“전 글을 쓸 때 머리가 맑아져요. 가장 행복한 순간이죠.”

글=최민우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