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대쪽'을 넘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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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솔직히 말해 이회창 (李會昌) 후보는 겁나는 사람이다.

대쪽같은 성격, 원칙주의자. 잘 웃지 않고 농담하는 것도 보기 어려운 강직한 법관 출신. 적당히 타협하며 이럭저럭 살아가게 마련인 보통사람들이 대하기엔 왠지 겁나고 괜히 송구스런 느낌이 드는 이미지를 느끼게 된다.

실제 그는 일상생활에서 나이가 한참 어린 아랫사람에게도 결코 반말을 하는 법이 없고, 평소 허튼 소리를 하는 것을 보기 어렵다고 한다.

정치를 하자면 으레 허풍과 너스레, 덕담도 필요한 법인데 그에겐 그런 것도 없다는 것이다.

누구를 만나 추어주거나 '분위기를 잡는' 모습도 보기 어렵다고 한다.

그 바쁜 경선과정에서도 측근이 써준 연설문을 조목조목 뜯어고치고 언론이 요청하는 앙케트 하나까지 자기이름으로 나가는 것인 이상 직접 챙긴다고 한다.

한번은 기자들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어떤 짓궂은 기자가 굳이 그에게 폭탄주를 권했더니 "나는 누구에게 떼밀려 억지로 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며 그 잔을 끝내 뿌리치더라는 것이다.

얼마나 겁나는 사람인가.

그가 후보가 되는 과정을 봐도 혀를 두르지 않을 수 없다.

선거에 나서본 경험이라곤 전혀 없고, 정치의 필수요소라고 하는 조직.자금.선전을 다뤄본 적도 없는 평생 법관 출신인 그가 기라성 같은 프로 정치인들을 누르고 후보가 됐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가 세력도, 조직도 없이 단신 신한국당에 들어간 것이 지난해 1월이었으니까 불과 1년반만에 필마단기로 신한국당이란 거대한 성 (城) 을 점령한 (? ) 셈이 됐다.

이런 일은 보통 강한 집념과 배짱, 보통 강인한 정신력과 추진력이 없고서는 될 일이 아니다.

역시 겁나는 인물이다.

지금 정치.경제.사회 할것 없이 부패와 무질서, 혼미와 방황, 퇴폐와 타락이 판치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李후보와 같은 '겁나는 지도자' 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강력한 지도력으로 원칙을 세우고, 대쪽같은 강단 (剛斷) 으로 악과 부패를 몰아내야 한다는 데는 누구도 이론 (異論) 이 있을 수 없다.

李후보가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받고 경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둔 것도 그런 기대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겁나는 이미지' 가 우리 시대상황이 요구하는 것이라 해도 정치가, 특히 최고지도자에 대해서는 그밖에도 다른 많은 덕목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령 국가와 국민을 이끄는 정책과 비전의 이미지는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고,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의 힘까지도 함께 모으는 포용의 이미지, 정적 (政敵) 과도 화합과 교감이 가능한 인간적인 폭… 이런 요소도 지도자에게 있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 사실 원칙이나 정의란 것도 국민이 납득하고 국민속에서 실현돼야 원칙이 되고 정의가 된다.

혼자 가는 원칙은 고고한 지사나 철학자의 몫일 뿐이다.

다면적 (多面的) 이고 역동적인 정치의 세계에서 정치적 근엄주의는 자칫 정치의 경직과 언로 (言路) 경색을 가져오기도 쉽다.

이제 李후보는 당내경선이라는 큰 고개를 하나 넘었다.

앞으로 대선이라는 또 하나 큰 고개가 남아있다.

지금껏 신한국당 경선과정에서는 세력확대와 표 모으기 경쟁만 벌어졌을 뿐 누구도 자기의 체취와 육성 (肉聲) 이 담긴 정책이나 비전은 내놓지 못했다.

그것은 李후보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국민은 아직 李후보가 파악하고 있는 국가 중심과제가 뭔지, 李후보가 집권하면 어떤 정치가 나올지 감 (感) 을 잡지 못하고 있다.

李후보는 이제 다시 대선고개를 향해 출발하면서 그걸 밝혀야 한다.

"나는 이런이런 정치를 하겠소" "내가 보기에 국가 중심과제는 이것이오" 라고 밝히고, 왜 그런 정치를 하려면 자기가 나서야 하는지, 왜 그런 국가과제의 해결엔 꼭 자기라야 하는지를 국민에게 설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겁나는 대쪽 이미지 말고도 더 많은 사람이 즐겁고 편안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과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게 하는 관용과 화합및 포용력의 이미지와 시스템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할 것같다.

그래서 대쪽을 넘어 누구에게나 푸근한 '느티나무 이미지' 같은 것을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송진혁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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