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시작된 곳은 경기·충청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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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판소리 명창 김소희(1917~95)의 생가를 찾은 배연형씨. 그는 국악계에서 실증적인 자료 수집과 활발한 논의를 강조하는 연구자로 꼽힌다. [배연형씨 제공]

  판소리의 발생지를 연구한 배연형(52·서울 휘경여중 교사)씨는 ‘고향과 이사’의 비유를 들었다. “전라도로 이사간 뒤 제 조상이 전라도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된 서울 사람을 판소리에 비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판소리가 경기·충청에서 시작됐다”는 주장이 담긴 책 『판소리 100년의 타임캡슐』(동국대학교 출판부)을 최근 펴냈다. 정설로 자리잡은 전라도 기원설을 뒤집는 주장이다. 그는 “음악의 특징과 용어 등으로 미뤄볼 때 경기·충청 지역 판소리가 더 오래됐으며, 200여년에 걸쳐 남부 지역으로 전파됐다”고 설명했다. “개화기 이후 서울에 ‘역수입’ 되면서 발생지에 혼란이 생겼다”는 것이다.

◆소리 수집 30년=배씨가 이렇게 주장하는 바탕에는 오래된 수집 이력이 있다. 그는 1980년대 초반부터 우리 소리를 담은 음반을 모으기 시작했다. 대학 국문과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하고 국어 교사로 일하기 시작한 직후다.

옛 음반을 모으는 ‘한국고음반연구회’를 조직하고, 최초의 음반 형태인 유성기(留聲器) 음반 리스트를 만든 것도 30대 초반의 배씨가 했던 일이다. 지금까지 그가 파악한 국내 유성기 음반은 6500여종. 그중 2000여장을 배씨가 소장하고 있다.

이번 책을 위해서는 10여년동안 자료를 모았다. 각 지역의 판소리 광대들이 교본으로 삼았던 ‘소리책’과 음반이 대상이 됐다. “주거가 일정하지 않았던 광대들의 소리책을 구하는 일은 골동품 수집 경로와 비슷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소장하고 있는 개인과 단체를 찾아 전국을 떠돌았다. “규칙적으로 학교에 매어있어야 하는 교사로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했다. 과로와 탈진으로 병원 신세까지 지기도 여러번, 비싸게는 100만~200만원까지 하는 희귀 음반도 사재를 털어 손에 넣었다.

◆만만치 않은 반론=고전문학을 전공하며 『춘향전』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시작된 배 교사의 소리 사랑은 이제 30년이 넘었다. 그는 “처음부터 아마추어가 아니라 학자 입장에서 체계적으로 자료를 모으고 연구했다”고 회고했다. 현재는 동국대 ‘한국음반 아카이브 연구단’의 연구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배씨의 30년이 축약된 이번 주장은 국악계에 논쟁을 남겼다. 유영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은 “판소리가 기록으로 남기 시작한 것은 이미 발생 한참 후의 일”이라며 “판소리 발생지는 기록 수집에 의해서 판단할 문제가 아니며 판소리의 근원 설화 등으로 미뤄볼 때 전라도 형성설이 신빙성 있다”고 반박했다. 노동은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교수는 “17세기 명창의 출신 지역은 전라도 지역에 몰려있다. 경기·충청 발생설은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고 비판했다. 국악 칼럼니스트 김문성씨는 “어느 한 지역에서 판소리가 생겼다는 주장보다는 각 지역에서 비슷한 형식의 소리가 존재했다는 식으로 넓게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중도 의견을 내놨다. 이에 대해 배씨는 “논쟁이 적고 점잖은 국악계에서 활발한 토론과 논의가 일어나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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