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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세월 속에 피고 진 베스트셀러 반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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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책을 읽지 않던 사람들이 사서 읽는 책’이라는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베스트셀러. 그런 베스트셀러 목록은 언제 처음 나왔을까? 『미국 베스트셀러의 문화사』를 집필한 마이클 코다에 따르면 1895년 미국의 출판 전문지 ‘북맨’의 편집인 해리 T 팩이 ‘이 달의 책 판매’난을 만들어, 월별로 많이 팔린 책의 목록을 실은 게 처음이다. 당시에는 6위까지만 수록했고 분야도 소설에 국한됐다. 주간 베스트셀러 목록은 1942년 8월 9일자 뉴욕 타임스 북리뷰에 실린 것이 처음이다.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1913년부터 ‘베스트셀러 신기록’을 내보내기 시작했는데, 미국 주요 도시 서적상들이 보고한 실제 판매량에 기초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최초의 본격적인 베스트셀러 집계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1950년대 중반 정비석의 『자유부인』(정음사)이 7만 부 이상 판매됨으로써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또한 언론 매체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을 다루고 초보적이나마 베스트셀러를 집계한 것은 60년대 초의 일이다. 당시의 베스트셀러로는 최인훈의 『광장』(정향사)과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을유문화사), 김광주의 『정협지』(신태양사), 김찬삼의 『세계일주 무전여행기』(어문각) 등이 있었다.

그러나 『자유부인』을 제외하면 베스트셀러의 기준은 대략 3만부였고, 73년에 나온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예문관)이 3년 동안 40만 부가 팔려 신기원을 이룩했으며, 밀리언셀러 시대는 80년대 초 김홍신의 『인간시장』(전 20권, 행림출판)이 100만 부를 돌파하며 열렸다. 현재까지 국내 작가 최고 기록은 88년 첫 출간 이후 1200만 부 이상 판매된 이문열의 『삼국지』(전 10권, 민음사)다. 90년대 초반 『삼국지』의 정가가 6500원이었으니 정가의 10%를 인세율로 적용하면 대략 80억원 가까운 인세 수입이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이문열의 『삼국지』도 아니고 『해리 포터』시리즈도 아니다. 76년부터 나오기 시작해 2천만 부 가까이 팔린 것으로 알려진 『운전면허 학과시험 문제집』이다. 2위는 여러 출판사에서 매년 출간하는 『대한민력』으로 추정되며, 역시 여러 출판사에서 펴내는 『일반상식』과 학습참고서 『수학의 정석』『성문종합영어』『동아전과』등이 뒤를 잇는다. 그런데 이런 책들은 많이 팔렸다는 점에서는 분명 베스트셀러지만, 책이라고 할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단행본은 아니다.

그런가 하면 숨어 있는 베스트셀러도 있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은 20권 분량의 전집으로 우리나라의 여러 출판사에서 해적판으로 번역 출간됐다. 방문 판매 위주로 판매된 이 책의 판매량을 정확하게 집계하기는 어렵지만, 출판계에서는 적어도 1천만 부 이상으로 추정한다. 그밖에 300만 부 이상 팔린 『밤의 대통령』을 필두로 많은 인기작품을 낸 대중 소설가 이원호는 판매량 면에서 ‘재야의 이문열’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50년대 『자유부인』, 70년대 최인호의『별들의 고향』, 80년대 『인간시장』등 베스트셀러의 역사에서 새로운 획을 그은 책들의 공통점은 이른바 본격 문학 혹은 순문학 작가가 집필한 대중소설이라는 점이다. 사회·문화의 흐름과 대중의 기호를 읽어내는 감각이 남달랐던 작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90년대의 대표적인 베스트셀러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창비), 황인경의 『소설 목민심서』(삼진기획), 김진명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해냄), 이우혁의 『퇴마록』(들녘) 등은 순문학 작가로서 경력을 쌓지 않았거나 경력이 있다해도 일천한, 사실상 무명의 저자들 작품이었다.

역대 베스트셀러 가운데 순문학 소설은 조정래의 『태백산맥』(한길사, 해냄), 황석영의 『장길산』(현암사, 창비), 박경리의 『토지』(솔, 나남) 등이다. 순문학 베스트셀러들은 모두 대하소설이며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었고, 여러 출판사를 거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특히 『토지』는 73년 문학사상사에서 처음 단행본으로 나온 뒤 삼성출판사·지식산업사·학원출판공사·솔출판사·나남출판사 등을 거쳤고, 이 가운데 솔출판사에 나온 책이 최초의 완간본이다.

80년대에는 대학가와 사회변혁운동 진영을 중심으로 이른바 사회과학서적이 널리 읽혔지만, 대중적으로는 크리슈나무르티의 『삶의 진실에 대하여』(까치)와 『자기로부터의 혁명』(범우사)이나 헤르만 헤세의 『괴로움의 위안을 꿈꾸는 너희들이여』(장석주 편역, 청하) 등, 일종의 안심입명(安心立命) 도서들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해인의 시집들, 서정윤의 『홀로서기』(청하), 김초혜의 『사랑굿』(문학세계사) 등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권위주의 정권의 압제 속에서 독서 풍토도 저항과 침잠으로 나뉘었던 셈이다.

한편 90년대 중반은 우리나라 베스트셀러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93년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비)와 96년 박영규의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들녘) 때문이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우리나라 필자가 집필한 본격 인문교양서가 밀리언셀러가 된 것이다. 비록 밀리언셀러는 아니지만, 94년 1권이 나온 이후 2권을 포함하여 50만 부 이상 팔린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도 비슷한 맥락에서 눈여겨 볼 만한 ‘베스트셀러급 스테디셀러’다. 주제로 보면 문화·역사·예술이 되는데, 이는 사회과학의 시대였던 80년대를 거친 독자군의 관심 영역이 문화 부문으로 바뀌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필자군 및 글쓰기의 다양화 현상과도 맞물려 있다. 예컨대 박영규는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았을뿐더러 전문 저술가로서도 신인이었다. 진중권은 94년 당시 미학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은 상태였지만 ‘책상머리 먹물 지식인’의 글쓰기와는 거리가 먼 새로운 글쓰기를 보여주었다. 유홍준 역시 ‘학삐리 논문 스타일’의 글말에서 벗어나 현장감이 살아 나는 입말을 구사했다. 주제의 변화 혹은 독자들의 관심 영역의 변화, 글쓰기 스타일의 변화, 필자군의 변화로 요약할 수 있다.

90년대 중·후반의 베스트셀러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대목은 실용서의 대두다. 물론 69년 하다케야마 요시오의 『이런 간부는 사표를 써라』(삼신서적), 73년 노먼 V 필의 『적극적 사고방식』(정음사) 등 간헐적으로 실용서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중후반부터 처세서, 경제·경영서 분야에서 베스트셀러가 나오는 일이 한결 잦아졌다. 예컨대 94년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김영사), 이명복의 『체질을 알면 건강이 보인다』(대광출판사), 96년 노구치 유키오의 『초학습법』(중앙일보사), 97년 나카다니 아키히로의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되는 50가지』(홍익출판사), 김찬경의 『돈 버는 데는 장사가 최고다』(현대미디어), 98년 구본형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생각의 나무)등을 들 수 있다.

이런 현상을 놓고 IMF 체제라는 외적 환경을 거론할 수도 있다. ‘평생 직장의 신화라는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장사에 나서 돈을 벌어야 하는’상황이 전개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책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 독자들이 책에 부여하는 의미의 변화를 반영하는 현상으로 보고 싶다. 사태의 본질과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길로서의 책, 요컨대 에피스테메(지식)의 스승으로서의 책이 아니라, 드러난 현상의 메커니즘을 빠르게 파악해 기술적·실용적으로 적응하는 데 도움을 주는 길잡이로서의 책, 테크네(물질)로서의 책을 독자들이 찾게 된 것이다. 우연치 않게도 90년대 중·후반은 초고속통신망이 빠르게 보급되면서 지식정보의 최종 심급으로서의 책의 위치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출판에서도 해외 트렌드의 실시간 확산이 갈수록 두드러진다. 명실상부하게 세계적인 동시 현상이 되어버린 『해리 포터』시리즈를 필두로, 미국 사회 새로운 계층의 부각과 그들의 생활 양식 및 태도 등을 분석한 데이비드 브룩스의 『보보스』(동방미디어), 우리 사회에 부자 열풍을 몰고 온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황금가지), 최근 미국과 유럽 사회의 한 흐름인 자발적 단순함(voluntary simplicity)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을 안내하는 로타르 J 자이베르트와 베르너 티키 퀴스텐마허의 『단순하게 살아라』(김영사) 등 2000년 이후의 베스트셀러들을 예로 들 수 있다.

미국 의회도서관 관장을 지낸 역사학자로서 미국의 독서 문화 진흥에 크게 기여 한 대니얼 J 부어스틴은 “인류가 이룩한 단 하나의 가장 위대한 기술적 진보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책을 꼽겠다”고 말했다. 많은 베스트셀러를 남겼으며 촌철살인의 경구로도 유명한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베스트셀러? 그저 잘 팔렸으니까 베스트셀러겠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명사(名士)란 그 사람이 널리 알려졌다는 점이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이지.” 그렇다면 베스트셀러도 다만 그것이 널리 알려졌다는 점이 널리 알려져 있는 책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19세기에 출간된 책 가운데 가장 짧은 시일 안에 가장 많이 팔린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생각해 본다. 1862년 출간 당시 파리에서 초판본 7000부가 하루에 매진됐고, 브뤼셀·부다페스트·라이프치히·런던·마드리드·리우데자네이루·로테르담·바르샤바 등 여러 나라 여러 도시에서 동시에 출간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훗날 전 세계 거의 모든 주요 언어로 출간됐고,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영화와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제작되어 각광받았다. 그저 많이 팔린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책, 요컨대 베스트셀러 그 이상의 베스트셀러야말로 모든 출판인, 모든 독서인들의 꿈이 아닐까 한다. 21세기 우리의 『레 미제라블』은 과연 어떤 책이 될 것인가?

표정훈(번역가)

<연도별 주요 베스트셀러>

*** 1950년대

『자유부인』(정비석, 정음사)
『청춘극장』(김래성, 청운사)
『보리피리』(한하운, 인간사)
『의사 지바고』(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여원사)
『비극은 없다』(홍성유, 신태양사)

*** 1960년대

『광장』(최인훈, 정향사)
『김약국의 딸들』(박경리, 을유문화사)
『정협지』(김광주, 신태양사)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이어령, 현암사)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혜린, 동아PR출판부)

*** 1970년대

『별들의 고향』(최인호, 예문관)
『어린왕자』(생 텍쥐페리, 문예출판사)
『객지』(황석영, 창작과비평사)
『위기의 여자』(시몬 드 보부아르, 정우사)
『당신들의 천국』(이청준, 문학과지성사)
『무소유』(법정, 범우사)
『부초』(한수산, 민음사)
『소유냐 삶이냐』(에리히 프롬, 홍성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문학과지성사)

*** 1980년대

『어둠의 자식들』(황석영, 현암사)
『인간시장』(김홍신, 행림출판)
『낮은 데로 임하소서』(이청준, 홍성사)
『젊은 날의 초상』(이문열, 민음사)
『자기로부터의 혁명』 (크리슈나무르티, 범우사)
『소설 손자병법』(정비석, 고려원)
『단』(김정빈, 정신세계사)
『해방 전후사의 인식』(송건호 외, 한길사)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J M 바스콘셀로스, 동녘)
『홀로서기』(서정윤, 청하)

*** 1990년대

『소설 동의보감』(이은성, 창작과비평사)
『소설 토정비결』(이재운, 해냄)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양귀자, 살림)
『세상을 보는 지혜』(발자크 그라시안, 둥지)
『반갑다 논리야』(위기철, 사계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유홍준, 창작과비평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김진명, 해냄)
『퇴마록』(이우혁, 들녘)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영미, 창작과비평사)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로버트 제임스 월러, 시공사)
『좀머씨 이야기』(파트리크 쥐스킨트, 열린책들)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박영규, 들녘)
『아버지』(김정현, 문이당)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잭 캔필드, 이레)
『고등어』(공지영, 웅진출판)

*** 2000년대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조앤 K 롤링, 문학수첩)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정찬용, 사회평론)
『창가의 토토』(구로야나기 데쓰코, 프로메테우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로버트 기요사키, 황금가지)
『가시고기』(조창인, 밝은세상)
『체 게바라 평전』(장 코르미에, 실천문학사)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스펜서 존슨, 진명출판사)
『보보스』(데이비드 브룩스, 동방미디어)
『한비야의 중국견문록』(한비야, 푸른숲)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웅진닷컴)
『블루데이북:누구에게나 우울한 날은 있다』(브래들리 그리브, 바다출판사)
『칼의 노래』(김훈, 생각의나무)
『파페포포 메모리즈』(심승현, 홍익출판사)

※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황석영의 『장길산』, 박경리의 『토지』, 이문열의 『삼국지』 등은 시기를 정하기가 곤란해 연도별 구분에 넣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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