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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럼>뒤바뀐 국가우선과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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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정부의 영 (令) 이 안 선다" 고 불평하는 관료가 요즘 늘어났다.

"문민정부니까 그런거 아니냐" 고 어깨가 처진 관료에게 '위로 아닌 위로' 를 하다 보니 아닌게 아니라 정부가 우습게 보이기도 한다.

하는 일마다 특정 이익단체나 반대그룹이 목청을 높이지 않는 일이 없고, 과천청사 앞에서 실력행사를 벌이면 정책이 슬그머니 후퇴하는 것이 여반장 (如反掌) 이다.

여기에 정부 스스로의 과욕까지 겹쳐 더욱 혼란스럽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을 벌이는 관료와 나서지는 않지만 자기 밥값은 하는 관료, 납작 엎드려있는 관료, 그리고 적극적으로 민간에 손을 내미는 관료로 구성돼 있다.

대통령이 인사를 잘 챙기고 장관이 부처를 장악하려면 아무래도 셋째나 넷째 부류보다 첫째나 둘째 부류를 잘 배합해 등용해야 할 것이다.

첫째 부류는 집권초기에 의욕적으로 개혁과제를 추진할 경우 꼭 필요하다.

그러나 일을 벌이다 보면 자칫 기존의 균형을 파괴하기 때문에 마무리를 깔끔하게 잘 할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하다.

이런 관료는 겉으로는 화려하지 않지만 관료로서 최소한도의 자긍심은 있는 부류다.

대개의 경우 보신주의로 무장해 있지만 자신의 출세에 도움이 되는한 맡은 일은 효과적으로 한다.

이런 관료는 정권말기에 이미 벌여놓은 일을 챙기고 정리할 것은 정리하는데 필요한 사람들이다.

물론 세번째와 네번째 부류는 항상 사정 (司正) 의 대상이지만 권력에 기생하는 독버섯과 같아 조직을 없애기 전에는 항상 존재한다.

그런데 이들을 잡겠다고 엄정한 사정을 하다 보면 왕왕 첫째나 둘째 부류가 걸려들기 때문에 항상 칼을 잘 써야 한다.

대체로 일을 벌이는 관료는 능력이 뛰어나고 성취감이 큰 부류라서 음해당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현정부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돌아보면 경제관료에 관한한 시기와 타입이 정확히 거꾸로 임용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창 개혁을 추진하는 초기에 즉 박력이 필요한 시기엔 마무리에 적합한 사람을 쓰고, 마무리가 필요한 시기엔 추진력이 강한 사람을 많이 등용한 것이다.

그 결과 신경제는 어느새 아침햇살에 말라버린 이슬이 돼버렸고, 구조조정은 표류하고 있으며, 때늦게 21세기 국가 우선과제가 등장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무엇이 지금 우선과제인가.

한보사태는 진정으로 끝난 것인가.

총리와 부총리가 취임하면서 그렇게 소리높여 강조한 규제혁파는 진행되고 있는가.

별로 경쟁력이 높아진 것 같지도 않고, 큰 재벌기업들이 속으로 멍들고 언제 파산할지 모르는데 정부와 대기업은 힘겨루기만 하고 있다.

채산성이 없는 기업은 합병을 통해서라도 유연하게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데 명분에 밀려 중요한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

과연 지금이 21세기 과제를 논할 때인지 잘 모를 일이다.

21세기과제중 첫 주제가 재정경제원이 한국개발원 (KDI)에 용역을 주어 발표한 물가구조 개편이다.

이중에는 단순의약품을 일반 슈퍼에서도 팔 수 있게 하자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얼마전 정부 스스로가 안된다고 내친 안건이다.

무슨 도깨비놀음인지 알 수 없다.

규제혁파를 하라고 총리와 부총리가 아무리 독려해도 이익단체와 이를 비호하는 정부부서가 소관업무라는 방벽을 치고 꼼짝을 하지 않는다.

이것을 고치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다.

그럴수만 있다면 얼마 남지 않은 정부가 그래도 자기 할 일을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정작 차분하게 해야 할 일을 조그마한 것이라도 정리하는 정부부서와 관료는 적고 너도나도 얘기하기 번듯하고 나중에 누가 그런 말 했나 하고 다 잊어버릴 장기과제만 외치고 있다.

규제개혁을 하겠다고 모인 정부위원회같은 곳에 가보면 한국정부에는 '규제개혁부' 와 '규제집착부' 라는 두개의 다른 정부가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국가를 선진국으로 진입시키겠다고 자신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먼저 규제집착부의 기능을 하는 정부를 잘라내고 규제개혁에 앞장서는 부서와 관료를 중용해야 한다.

규제개혁을 추진하는 관료는 이익단체의 역풍에 맞기 쉽다.

가만히 앉아있다 관료를 그만두고 나서 차후에 갈 자리라도 챙기려면 유능하게 보이기보다 무능한 것이 낫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한국정부 중에는 규제집착부만 살아남을 것이다.

<장현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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