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세계적 보호주의 경쟁의 종착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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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의 시대가 다가오는가? 세계경제의 기존 관념들이 무너져 내리고 지구사회는 지금 마치 외줄 타는 곡예사처럼 위태위태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보호주의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과거 패권국가들이 그랬듯 미국은 재화를 생산해 벌어들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소비하기를 즐겼다. 국민들은 신용카드 빚으로 풍요를 누렸고, 정부는 엄청난 재정적자를 감수하며 이라크전쟁을 치렀다. 팽창적인 경제정책과 넘치는 대출에 힘입어 신용불량자들도 주택을 쉽게 구입했고, 부동산 붐이 일었다. 그러나 부동산 거품이 한번 꺼지자, 물려 있던 미국 금융기관들뿐 아니라 이와 연결된 세계 도처의 금융기관들이 무너졌다. 이제 세계 금융위기는 70여 년 만의 최대 실물경제 위기로 번져가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패권국을 따라잡기 위해 열심히 국력을 길러 오던 중국과 같은 국가들의 행태는 대조적이었다. 이들은 생산해낸 재화보다 훨씬 덜 소비하고 저축에 힘쓰면서 남은 재화를 외국에 수출해 성장해 왔다. 이들은 그렇게 외국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미국 정부의 채권을 사들였고, 결국 미국에 빚을 빌려주어 그들의 과잉 소비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수출도 늘려온 셈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거품이 꺼지고 소비가 위축되니까 중국 같은 나라에선 과잉 생산돼 남아도는 재화들의 처리 문제가 생겨났다. 물론 가장 바람직한 것은 중국 스스로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심리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지난 30년간의 성공을 가져온 수출주도형 경제모델에 집착하고 있기에 하루아침에 내수 중심 경제 체질로 바뀔 수 없다는 게 문제다. 결국 중국의 내수증대도 당장의 위기 해결을 위한 효과적 방책이 되기는 힘든 것이다.

이처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의 남아도는 재화가 세계경제에 보호주의 압박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은 중국이 수출을 늘리려 환율을 조작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중국은 이를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받아쳤다. 또 상원에서 완화되긴 했지만, 미국 하원을 통과한 경기부양 법안에는 정부 발주 공사에 국내산 철강만 쓰라는 ‘바이 아메리칸’ 조항이 들어 있었다. 유럽은 미국 정부가 자동차산업에 구제조치를 취한 것도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에 위배되는 보호주의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만일 미국과 중국이 보호주의 경쟁에 진입하고 이것이 세계적으로 파급되면 어떻게 될까? 이는 1930년대 대공황이 보호주의 경쟁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연결된 것처럼 상당한 국제정치적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다. 보호주의 경쟁은 결국 모든 나라의 경제를 붕괴시킨다. 그런데 경제가 나빠지고 실업자가 늘어나면 국민의 불만이 증대한다. 그런 상황에서 국내정치는 불안해지고 극단적인 민족주의나 선동적 지도자들이 등장한다. 1930년대 독일에서 히틀러가, 일본에서 군국주의 정권이 들어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도 공황과 보호주의로 인한 국내경제의 파탄 때문이었다.

미·중 간에 보호주의 경쟁이 벌어진다면 지난 30년간의 협력관계는 불신과 대결구도로 바뀔 것이고, 세계 정치는 크게 불안해질 것이다. 그동안 미·중 협력관계는 북핵문제 등 한반도 안정화를 위한 국제적 노력의 기본 축이었기에 대결로 치닫는 경우 한반도 상황도 더욱 불안해질 것이다. 더구나 세계경제가 침체되고 보호주의가 극성을 부리면 북한에 대한 지원도 감소할 텐데 외부 지원으로 버텨 나가고 있는 북한은 온전할 것인가?

세계경제가 보호주의 경쟁으로 치달으면 맨 먼저 치명적인 피해를 볼 나라는 한국처럼 경제 규모가 작은 수출주도형 국가들이다. 수출이 안 되면 수많은 실업자가 양산될 것이고, 이로써 정치적 불만이 크게 누적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민주주의 제도와 역량이 이러한 불만을 능히 소화해낼 정도로 튼튼하지 못하다는 게 최근 수년간의 촛불시위로 밝혀졌다.

이처럼 오늘날 현실은 잠자다가도 소스라쳐 깨어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경제위기하에서 양극화를 막고 용산참사 같은 사건이 근본적으로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구체적 정책대안과 사회보장책은 무엇인가, 위기 국면에서도 정치 불만을 잠재우고 국민을 통합해 내기에 충분한 민주적 장치는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점증하는 북한의 불안 요인은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여야가 머리를 싸매고 논의해야 할 시급한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과연 우리의 정치권은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윤영관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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