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위험에 대한 사회분위기에 경종 - 황장엽씨 기자회견에 담긴 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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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황장엽(黃長燁)씨는 10일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전쟁준비 상황과 김정일(金正日)체제의 내부 움직임을 비롯한 정치.경제.사회.대남관계등을 포괄적으로 언급했다.

그의 입에서 기대했던 만큼의 구체적 증거나 새로운 사실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전쟁위험의 심각성을 새삼 일깨워주고 북한체제의 모순을 극명하게 재조명케 한 것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대목으로 꼽힌다.

특히 黃씨가 관계당국의 신문에서 밝힌 북한의 전쟁준비 실태는 전쟁 망각상태에 빠져있는 우리 사회분위기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내용이다.그동안 북한의 전쟁 도발책동에 대해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만 사회일각에선 이를 강건너 불보듯 해온게 사실이다.

92년 김정일이 최고사령부를 중심으로 남침 시나리오까지 작성,실행에 옮기려 했다는 사실등은 충격적 내용이 아닐 수 없다.그의 증언은 그가 얼마전까지 북한의 핵심 권력층에 몸담았던 거물급 인사라는 점에서 그만큼 무게를 더하는 것이다. 黃씨는 북한체제를 한마디로 봉건적 군사체제에 바탕을 둔 범죄집단으로 규정했다.

김일성(金日成)과 함께 수십년동안 당사업을 해온 黃씨의 이같은 체제진단은 북한정권에 대한 사형.파산선고에 다름아니다.안기부가 黃씨의 망명을“주체사상이라는 북한의 이론적 토대가 붕괴돼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결론지은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날 조사결과 발표와 기자회견에도 불구하고 그의 망명을 둘러싸고 제기됐던 몇가지 의구심들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이른바 '황장엽 리스트'에 대해 黃씨나 관계당국은 모두 그 존재를 부인했다.그러나 黃씨는'주워들은 이야기'를 진술했다고 했고,관계당국도 이미 黃씨의 진술을 토대로 수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黃씨가 기록해 가져온 리스트는 없지만 진술한'황장엽 리스트'는 있는 셈이어서 앞으로 수사결과에 따라선 엄청난 파장을 부를 소지가 충분하다.북한의 핵보유 여부도 개운하게 결론나지 않았다.黃씨는 전문가가 아니어서 잘 모른다고 전제한뒤 북한에선 자기들이 핵을 가지고 있다고 모두 믿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 위장망명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불렀던 그의 망명동기는 어느 정도 희석됐다.그는 식량난에도 불구하고 전쟁준비와 주민탄압을 자행하는 김정일체제에 염증을 느끼던중 모스크바 세미나에서의 주체사상 선전을 소홀히 했다며 지난해 6월 김정일로부터 책임추궁을 받고 환멸을 느꼈다.당시 전쟁노선 포기와 개혁.개방을 촉구하는 유서를 쓰고 자결하려는 생각까지 했으나 전쟁준비를 폭로,저지하기 위해 망명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자신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했고 법적으론 귀순자라고도 했다.

黃씨의 망명은 남한 뿐만 아니라 북한체제 내부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당초 예상보다 훨씬 강경한 대북(對北)인식과 김정일 체제에 대한 비판은 북한 고위층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조만간 확산될 것이라는게 북한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영종 기자

<사진설명>

황장엽씨가 울산 현대중공업 컨테이너선 조타실을 찾아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안기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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