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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선불교 답사기 '밥그릇이나 씻어라' 이은윤 종교전문위원 著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당신은'선'(禪)이라는 글자에서 무엇을 떠올리는가.묵상.해탈.정적등을 연상하는가.아니면 속세의 번뇌를 초월한 산사(山寺)의 고승(高僧)을 그리는가.그렇다면 당신은 선의 절반만 이해했을 뿐.선은 세상을 초탈한 은둔자의 계명이 아니라 바로 지금 당신과 함께 하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내년까지 4권 완간 중앙일보 이은윤 종교전문위원의'밥그릇이나 씻어라'(자작나무刊)는 이같은 선의'속내'를 본격적으로 파헤친 책이다.'중국 선불교 답사기'란 주제로 제1권이 나왔다.내년 상반기까지 모두 4권으로 완간될 예정. 시리즈 첫권 제목으로 인용된'밥그릇…'는'천하조주'(天下趙州)란 명성을 드날린 동아시아 선불교의 거장 조주종심선사가 불법을 구하려 그를 찾아온 학인(學人)과 나눈 대화에 나온다.

조주:아침은 먹었는가. 학인:예,죽을 먹었습니다.

조주:그러면 어서 밥그릇이나 씻어라.(洗鉢盂去) 무심히 밥그릇을 닦는 소박한 행동이 바로 도의 실천임을 깨우쳐 주는 화두(話頭.원래 명칭은 公案)다.같은 조주선사의'끽다거'(喫茶去)도 있다.“전에 여기에 온 일이 있는가”는 질문에“예,온 적이 있습니다”와“처음입니다”라고 상반된 대답이 나오자 조주는“끽다거(차나 마셔라)”라고 타이른다.일상의 평상심이 바로 진리라고 설파하는 것. 책에는 이같은 중국 당(唐).송(宋) 대선승들의 행적과 그들에 얽힌 사연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각종 화두를 밋밋하게 풀이하는 차원을 넘어 당시 상황과 변천과정도 입체적으로 짚고 있다.

중국서도 시도 못한 작업 가장 주목할 점은 저자가 중국 선불교의 유적을 일일이 답사했다는 사실.지난해 3월부터 석달간 11개성 86개 고찰(古刹)을 순례했다.문화혁명기(65~76년)에 폐쇄됐다 90년대초 공개되기 시작한 사찰들을 찾아다녀 갈피갈피 현장감이 묻어나온다.중국인들조차 시도하지 못했던 초유의 작업.제1권은 하북성과 하남성에 초점을 맞췄다.

저자는 선불교의 특성을 5가지로 요약한다.혁명성.실천성.일상성.직관성.단순성이 그것.파격적 발상에 기초한 기지와 해학에서 우러나오는 선승들의 일화가 압권.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뿌리인 임제종을 연 임제의현선사는 스승의 뺨을 후려갈기고,수많은 선사들 가운데 괴짜승으로 꼽히는 단하천연선사는 대웅전 목불(木佛)을 불에 살라 언 몸을 녹인다.선불교 창시자인 보리달마를 따랐던 혜가는“천하에 붉은 눈이 내릴 때 너를 제자로 삼아 주마”는 스승의 말에 자기 왼팔을 잘라 흰 눈을 붉게 물들였다.그만큼 선은 관습.관행같은 사회적 제약에서 자유롭다는 뜻. 사회 씻어내는 키워드 저자는 선의 현재적 의미에도 무게를 싣는다.서구문명의 한계를 극복하고 21세기를 이끌 사상으로 선불교를 지목한다.특정 종교에 대한 관심이나 복고적 취향이 아니라 세계사적 관점에서 선에 대한 필요성이 절실하게 요청된다는 것.“선불교는 자연과 인간,물질과 정신,몸과 마음,성(聖)과 속(俗)을 둘로 나누는 서구 합리주의와 기계문명을 극복할 대안 사상이다”고 규정한다. 선은 또한 혼란한 우리 사회를 풀어나갈 키워드로도 제시된다.자연의 순리를 따르며 엉뚱한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무사인'(無事人)이 강조되는 것.저자는“대통령 자질이 없으면서도 대통령 하겠다고 나섰던 5.6공 시절 한국정치의 질곡은 결국'무사'를 거스른 업보”라고 꼬집는다.눅눅한 장마철 습기와 답답한 우리 현실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지혜의 육성이 책장마다 울려 퍼진다.어서 당신의 밥그릇이나 씻으라고. 박정호 기자

<사진설명>

중국을 비롯해 동아시아 지역 선불교의 거물이었던 조주종심 선사가 불법을 설파했던 옛 관음원이 최근 백림선사로 새롭게 복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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