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철의 중국산책] 연설할 땐 청중 중 누가 신발 벗나 봐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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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영국을 방문한 원자바오가 한 컨퍼런스에 참석해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의 강연을 듣고 있다. 왼쪽 위는 원 총리가 케임브리지 대학 강연 도중 봉변을 당한 신발 사진.

지난해 말 베이징의 중국 외교부 내외신 기자회견장.
기자들 앞에 선 류젠차오 외교부 대변인이 한 말씀 했다.
"앞으로 기자회견을 진행하면서
누가 신발을 벗는지 예의 주시하겠다"고.

순간 폭소가 터졌다.
이라크에 간 부시 미 대통령이 연설 도중
이라크 기자로부터 신발 투척 세례를 받은 뒤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유럽 순방에 나선 원자바오 총리가 마지막 기착지인
영국에서 봉변을 당했다.

케임브리지 대학 강연 도중
이라크 기자를 흉내 낸 27세의 청년에게
신발 투척 세례를 받은 것이다.

곧바로 장위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강한 불만"을 영국에 전달했다고 말했다.
류젠차오 대변인이 이에 대한 입장을 밝힐 수 있었다면
정말로 묘한 상황이 전개됐을 터이지만
류 대변인은 얼마전 운 좋게도(?) 필리핀 대사로 발령 받았다.

아뭏든 온화하고
말씀마다 시가 터져 나올 정도로
학자풍인 원자바오 총리는 상처를 받은 듯 하다.

부시 대통령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신발 투척도 일종의 의사 표시라며 어물쩍 넘어간데 반해
원자바오 총리는
"이런 저속한 수법으로는
중영 양국 인민의 우의를 막을 수 없다"고 정색했다.

중국의 제 4세대 지도부는
장쩌민을 핵심으로 한 3세대 지도부에 비해
국제 무대에서 맞닥뜨리는 항의에 대해 보다 경직적이다.

후진타오 주석도
2006년 미국 방문 때 백악관 환영의식 행사장에서
파룬궁 구호를 외치는 한 여성의 소란에 표정이 굳어져
그날 밤 만찬장에서까지 밝은 얼굴을 짓지 못했다고 한다.

반면 1997년 11월 미 하버드 대학교 연설장을 찾은
장쩌민은 항의대를 향해
"당신들 소리도 크지만, 내 소리가 더 크다"며 응수하는 여유를 보였다.

재미 화인학자 자오수이성(趙穗生)은
원자바오 총리가 신발 투척을 받은 사태가
강화되는 중국의 민족주의 경향을 더 부채질 할 것으로 전망한다.

서방의 행태를
민주주의의 다양성과 복잡성 차원에서 이해하기 보다
'아직도 중국을 얕보는 서방' '버릇없는 서방'이란 생각을 갖게 하면서
'서구 방식으론 안된다' '역시 중국 방식으로 가자'는 주장에
힘을 더하게 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아뭏든 미국에 불만 있을 때는 주중 미 대사관을 찾아 시위를 벌이고,
프랑스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까르푸 불매 운동을 벌였던 중국이
이번 영국 봉변에 대해선 그저 '외교적 항의'로 끝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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