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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한 번 듣고 반했어, 나를 흔든 그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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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메모리’엔 한때 수고양이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으나 이젠 볼품 없어진 늙은 암고양이 그리자벨라의 회한이 담겨 있다. 사진은 최근 한국 공연에서 그리자벨라를 연기한 옥주현씨의 모습. [클립서비스 제공]

명불허전이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뮤지컬 노래는 결국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뮤지컬 작품에서 나왔다. “입에 착착 감기는 노래 한 곡만 있어도 뮤지컬은 성공한다”는 속설을 이번 팬 투표는 여실히 증명했다. ‘베스트 7’에 선정된 노래들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인은 어느 순간에 심장이 뛰는지도 짐작이 갔다. 가슴을 치거나, 드라마틱하거나, 짜릿해야 했다. 무엇보다 ‘찡한’ 무언가가 담겨 있어야 했다.

최민우 기자

1 캣츠 메모리

 뮤지컬 ‘캣츠’는 본래 T S 엘리엇의 시를 바탕으로 쓰였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에 의해 초고가 완성되고 음악이 덧붙여진 뒤 시연회를 열었다. 그러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한 가지가 빠진 것 같다”는 게 연출가 트레버 넌의 반응이었다. 이때 엘리엇의 미망인은 “남편의 시 중 발표되지 않은 게 있다”며 유작시를 하나 건넸다. 진솔하면서도 삶의 이면을 담아내는 글이었다. 웨버는 당장 하루 만에 곡을 써내려 갔다. 그걸 받아든 연출가는 주변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지금이 몇 시, 몇 분인지 정확히 기록해 두라. 우린 뮤지컬 역사에 길이 남는 순간을 함께하고 있다.” ‘메모리’의 탄생은 이토록 극적이었다. 1982년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를 거쳐 이듬해 미국 공연 당시, 한 해 동안 라디오에서 ‘메모리’는 무려 100만 번 전파를 탔다. 지금껏 이 노래를 리메이크한 가수도 150명이 넘는다. 불멸의 노래는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볍게 1등 옥좌에 올랐다.

2 오페라의 유령 오페라의 유령

 유령은 자신의 거처로 여인을 납치해 간다. 그 길은 험난하면서도 은은하다. 컴컴한 지하의 미로를 지나면 배가 한 척 떠 있다. 유령은 노를 젓고, 안개 자욱한 뱃길엔 푸른 빛의 촛불이 그들을 안내한다.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길이지만, 이런 매혹이 있다면 목숨마저 걸 만하지 않을까. 뮤지컬 역사상 가장 환상적인 장면으로 손꼽히는, 바로 이 대목에서 울려퍼지는 게 타이틀곡 ‘오페라의 유령’이다. 신시사이저의 규칙적인 리듬은 롤러코스터처럼 객석의 심박수를 조금씩 끌어올리더니, 마침내 한 옥타브씩 높아져 가는 마지막 귀곡성엔 위압감마저 엄습해 온다. 쉽게 따라 부르기보다는,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아우라. ‘오페라의 유령’은 그렇게 대중을 휘어잡았다.

3 지킬앤하이드 지금 이 순간

 어쩌면 관객보다 배우들이 더 좋아하는 노래일지 모른다. 오디션이 있을 때면, 남자 배우들은 한결같이 자유곡으로 이 노래를 부른다. 너무들 많이 불러 심사위원들이 지겨워한단다. 첫 마디 시작하면 “됐고요, 클라이맥스만 불러 보세요”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숱하다고. 잔잔한 멜로디로 출발해 조금씩 감정의 골이 깊어지더니 어느새 치고 올라가는 격정적인 마무리. 가사 또한 시적이다. ‘날 묶어 왔던 사슬을 벗어던진다’ ‘내 육신마저 내 영혼마저 던지리라’ 등 비장미로 가득하다. 미 공화당 전당대회·올림픽·수퍼보올 등 대형 이벤트에선 어김없이 등장하곤 했다.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되는 선택의 순간, 이 노래는 바로 이 지점을 적확하게 파고들어 울림을 가져왔다.

4 맘마미아 댄싱 퀸

 ‘댄싱 퀸’이 고작(?) 4위라니. 의외의 결과다. 이 노래는 라디오에서 자주 실시하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팝송’에서 비틀스의 ‘예스터데이’와 함께 늘 1, 2위를 다투곤 했다. 이만큼 인기 있고 인지도 있는 노래는 거의 없다. 오히려 본래 뮤지컬 노래가 아닌, 팝송에서 건너와 순수 혈통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뮤지컬 팬들의 지지를 덜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1977년에 발표 됐다. ‘뉴스위크’는 “‘아바’의 부패하지 않은 ‘이지 리스닝’ 사운드의 대표곡”이라고 평했다. 뮤지컬 삽입 지점도 절묘하다. 옛 애인들의 출현으로 당황해하는, 40대 중년의 도나에게 또래 친구들은 “신나게 즐겨봐, 인생은 멋진 거야, 우∼기억해 넌 정말, 최고의 댄싱 퀸”이라고 북돋운다.

5 노트르담 드 파리 대성당들의 시대

 한국에 불어닥친 프랑스 뮤지컬의 승리였다. 뮤지컬의 본고장 영미권에선 철저히 외면받았지만, 유독 한국인들은 프랑스 뮤지컬에 열광했다. 심지어 “사라져 가던 프랑스 뮤지컬을 한국 팬들이 되살렸다”란 분석까지 나올 정도다. 그 출발점은 2005년 ‘노트르담 드 파리’였다. 프랑스어 특유의 운치 있고 감미로운 가사, 단일 세트가 주는 무게감과 여백미, 댄서들의 폭발적인 움직임 등이 무대를 장악했다. 압권은 멜로디였다. 커튼콜 때 무반주로 불리는 ‘대성당들의 시대’는 한번 들으면 결코 입가를 떠나지 않는 중독성이 무기였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감성의 극단에 푹 빠져드는 건 한국과 프랑스의 공통점 아닐까.

6 그리스 서머 나이트

 경쾌하고 발랄하다. 어디에도 구김살은 없다. 바람둥이지만 나름 순진한 구석이 있는 대니와 새침데기·내숭쟁이지만 결코 밉지 않은 샌디는 그렇게 조금씩 서로의 사랑을 확인해 간다. ‘그리스’는 영화가 먼저였다. 78년 개봉 당시 사운드 트랙은 그해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12주나 1위에 올랐다. 섹시 아이콘이었던 남녀 주인공 존 트라볼타와 올리비아 뉴턴 존은 그 자체가 ‘청춘’이었다. 그렇게 잊혀질 것 같던 ‘서머 나이트’가 한국에서 다시 살아난 계기는 CF였다. 정우성과 고소영이 등장한 한 청바지 광고에 배경음악으로 쓰이면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젊음의 상징처럼 서서히 대중에게 스며들어 갔다.

7 헤드윅 사랑의 기원

 뮤지컬 매니어의 힘이었다. 일반인에겐 낯설기 그지 없는 이 노래는 처음엔 하위권에 머물렀다. 그러나 매니어들 사이에 팬 투표 소식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강한 결집력을 발휘, 순식간에 순위를 치고 올라와 베스트 7에 드는 기염을 토했다. ‘헤드윅’은 트랜스젠더 이야기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처절하게 침잠해 가는 주인공의 심리와 상황을 노래는 표현한다. 그 안엔 오래전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갈라지기 전 하나의 쌍으로 이루어진 완성체였다는, 신화적·철학적 스토리를 내포하고 있다. 자신의 쓰라림을 울부짖듯 읊조리는 목소리는 상처받으면서도 처연한 영혼, 그 자체였다.



‘티켓링크’ 팬 투표로 선정

 ‘한국인이 사랑하는 뮤지컬 노래’는 1월 16일부터 28일까지 예매 사이트 ‘티켓링크’를 통해 팬 투표로 결정됐다. 아무런 예시 없이 무작정 신청을 받는 건 현실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뮤지컬 전문가 10인으로부터 각각 5곡의 뮤지컬 명곡을 추천받았다. 이를 통해 25곡의 후보곡을 선정했고, 이를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해 팬 투표를 유도했다. 단지 투표만 하기보다 이참에 뮤지컬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있게끔 했다. 이번 순위는 100% 네티즌 투표에 의해서다. 전문가와 대중 간에는 약간의 온도 차가 있었다. 전문가들에게 가장 높은 지지를 받은 곡은 ‘레미제라블’의 ‘on my own’과 ‘렌트’의 ‘seasons of love’였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겐 다소 생소한 탓인지 순위에선 10위권 밖으로 밀렸다. 유일한 창작 뮤지컬곡인 ‘명성황후’의 ‘백성이여 일어나라’ 역시 11위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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