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의병을!” 일자리 나누기를 외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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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방문 학자로 연구 중인 이계안 전 의원이 일자리를 나누자는 긴급 제안을 보내왔다. 현대자동차 CEO 출신으로 금융에도 밝은 그가 세계 경제 위기의 진원인 미국에서 띄우는 한국 경제를 위한 제언을 부정기로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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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면 출근길 직장인들이 서울 여의도 거리를 메운다.

그들은 ‘명예’를 강제로 나눠줬다. 국제통화기금(IMF)에 경제주권을 내주던 겨울이 코앞에 닥친 어느 날, 세상은 월급쟁이들에게 원치 않는 명예를 나누어주었다. 느닷없이 하사 받은 우울한 명예와 함께 그들은 일자리를 잃어야 했다. 숱한 사람들을 명예퇴직으로, 실업자로 몰아가면서 버텨 낸 나라가 지금 흔들리고 있다.

“우리 민족은 의병 운동으로 위기를 돌파 … 이번 경제위기에서 의병 운동은 잡 셰어링” #이계안 전 의원의 하버드 통신

세계 경제 3대 기관차인 미국, 유럽연합(EU), 일본은 모두 살아남기 전쟁에 들어갔다. 일본에 이어 미국도 정책금리를 0%대로 낮췄다. 미국, EU, 일본은 천문학적 규모의 재정공급을 통한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다. 그럼에도 이들 나라가 2009년에 마이너스 성장을 피할 수 없다는 게 전문기관의 대체적 전망이다.

한국의 최대 수출국 중국은 경제성장률 8%가 마지노선이라 한다. 미국, EU, 일본 등의 경기부진으로 해외수요가 위축될 것은 뻔하다. 이를 메우기 위해 중국은 소비를 대대적으로 진작하고 공항, 고속도로, 항구 등 사회간접자본(SOC)에 대해 대규모 투자를 벌여 내수경기를 떠받치려 하고 있다.

설령 어렵사리 중국이 8% 성장을 지켜낸다 해도 한국의 수출 감소는 구조적으로 불가피한 상황이다. 한국이 중국에 수출하는 대부분이 중국이 해외에 파는 상품에 들어가는 원부자재이기 때문이다. 지난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는 성장을 지속해 왔다. 그러나 그것이 국민소득 증가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단적으로 2004년 이후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연평균 4.8%에 달하나 국민총소득 증가율은 2.8%에 불과하다.

얇은 지갑 사이로 떨어지는 눈물

이처럼 소득이 경제성장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GDP 성장에 55% 정도 기여하는 민간소비는 크게 활성화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게다가 가처분소득의 150% 수준에 육박하는 막대한 가계부채, 부동산 가격과 주가 폭락에 따른 부의 자산효과, 금융기관의 자산건전성 악화로 인한 신용경색, 고용악화로 인한 미래 수입 불안까지 겹쳐 민간소비는 상당기간 되살아날 희망이 거의 없다.

우리 경제의 설비투자는 2006년 이후 2007년 상반기까지 평균 9% 정도 증가를 기록해 왔다. 하반기 들어 증가율이 급락하더니 마침내 2008년 2분기에는 0.7% 증가에 그쳤다. 건설투자는 마이너스 증가율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불행히도 향후 전망은 이보다 더 어둡다. 수출시장 악화, 내수 부진, 신용경색으로 설비투자도 마이너스 증가율을 보일 것이 거의 확실하다.

90년대 말 아시아 경제위기는 한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의 외환 수급 악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명예퇴직 등 고용감축을 통한 눈물 어린 희생 등 과감한 구조조정으로 경쟁력을 회복한 기업들은 원화 가치 하락에 힘입어 수출시장을 적극 개척하며 짧은 시간에 위기를 극복해낼 수 있었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사뭇 다르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이래 미국, EU, 일본 등 전 세계가 처음으로 동시에 겪고 있는, 그 넓이와 깊이를 여전히 가늠키 어려운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가 설령 원화를 평가절하하고, 기업 구조조정을 통해 원가를 낮춰 경쟁력 있는 상품을 내놓더라도 물건을 사줘야 할 상대인 미국, EU, 일본은 물론 중국마저 형편이 어려워 단지 수출 확대로 단기간에 이를 이겨내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앞서 말했듯 민간소비 또한 빠른 속도로 증가하리라 기대할 수 없다. 이처럼 수요가 뒷받침되지 않는데 기업이 선제 투자를 하는 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미분양 아파트가 차고 넘치는 현실에서 주택경기가 활성화되리라 여기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서로 다른 위기, 극복방식도 달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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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위기다.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수출, 민간소비, 투자 가운데 어느 하나 믿을 만한 것이 없는 실정이다. 이 위기를 헤쳐나가지 못하면 반복되는 명예퇴직, 실직과 노숙, 양극화를 비롯한 심각한 사회갈등이 우리 앞에 닥쳐 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동시장을 안정시킬 특별한 방안이 필요한 이유다. 이에 우리 민족에게 시련이 닥칠 때마다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지키기 위해 떨쳐 일어섰던 선배들의 ‘의병정신으로 일자리 나누기’를 제안하고자 한다.

오늘의 경제위기에서 일자리를 지키고 만드는 일은 나라와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자 한 의병활동과 다름없다 하겠다. 신분의 높낮이, 배움의 많고 적음, 출신을 불문하고 누구의 명령이나 부름 없이 분연히 일어나 기꺼이 열정과 목숨을 바친 의병정신이야말로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일자리 나누기 ‘의병시대’를 위해서는 각자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기업은 다시 맞은 경제위기가 엄중하지만 지난 외환위기 때처럼 ‘명예훈장’을 달아주면서 사람들을 삭풍 몰아치는 거리로 내몰지는 않아야 한다. 노조는 완전고용은 시장만이 보장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고 위기극복을 위해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즉 노동시간 감소와 그에 따른 소득 감소 등 고통을 나눠 지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정부는 기업과 노동조합이 먹을 것, 입을 것, 살 곳을 나누고 합쳐 ‘일자리 나누기’를 할 때 불가피하게 늘어나는 비용을 분담해야 한다. 특히 연구개발, 인력훈련, 해외시장 개척 및 네트워크 구축을 적극적으로 지원, 제도화해야 한다.

시민사회는 지금의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나가기 위해서 ‘일자리 나누기’가 필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하는 곳과 연대해 다양한 사업을 벌여나가야 한다. 일과 가사의 균형 있는 사회 만들기 캠페인, 일자리 나누기에 동참한 기업 상품과 서비스 우선 구매, 노동조합에 참여 촉구, 정치권에 일자리 나누기 지원을 위한 입법 활동 촉구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중차대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처방은 일자리에 달려 있다. 앞서 진단한 대로 수출, 민간소비, 투자가 하루아침에 호전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는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 그 방안으로 일자리 나누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깊은 고민 끝에 이 고비를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우리 역사 속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의병들에게서 구하면서, 위기와 시련 앞에 흘린 의병들의 눈물이 이 땅에 뿌린 역사의 씨앗이었음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에게 ‘의병시대’를 함께 열어가자고 간곡히 호소한다.

이계안.

전 국회의원,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현대그룹에 입사해 현대자동차 사장, 현대캐피탈·현대카드 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 후 정치에 입문해 17대 의원을 지냈다. 의원 시절 재정경제위, 예산결산특위 등에서 활동한 경제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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