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바지계약’에 더 멍드는 주택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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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건설사는 계약자들의 중도금 대출로 공사비를 마련했다. 강 사장은 “갑(건설사)과 거래를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응했다”며 “입주 후 집값이 오르지 않으면 직원들의 손실분을 사장이 다 물어줘야 할 판”이라고 하소연했다.

#2007년 울산에서 아파트를 분양한 D건설은 요즘 분양권 전매업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기존 계약자들로부터 아파트 여러 채를 한꺼번에 사들이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나서다. 이 회사 분양소장은 “분양가 밑으로도 아파트를 사겠다는 사람이 없자 중도금·잔금 부담에 쫓긴 일부 계약자가 수수료를 주고 새 계약자 명의를 빌려 아파트를 넘기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택업계가 ‘바지계약’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형태는 크게 세 가지. 즉 ▶건설사가 직원이나 협력업체에 미분양을 떠넘기거나 ▶브로커가 수십 명의 바지계약자 명의를 빌려 미분양을 계약하곤 중도금 대출금을 가로채고 ▶기존 계약자가 바지계약자에게 500만원 정도의 사례비를 주고 분양권을 전매하는 것 등이다.

주택·금융시장이 혼란에 빠지는 건 당연하다. 미분양을 떠안은 협력업체들은 현금을 마련하려고 분양가보다 싸게 아파트를 팔 수밖에 없다. 한아름주택 강주택 사장은 “협력업체가 떠안은 아파트도 결국 미분양이기 때문에 시장에 부담만 주는 꼴”이라며 “이런 단지는 입주 후에도 가격이 제대로 형성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분양권을 중간에 사들인 바지계약자는 중도금 대출금을 떼먹기도 한다. 이 경우 채무는 보증을 선 건설회사가 진다. 부산경찰청은 최근 무직자 등 60명의 명의를 빌려 미분양 아파트를 이들 앞으로 등기한 브로커를 적발했다. 브로커는 주택금융공사의 모기지 대출을 받아 82억원을 가로챈 것이다.

폐해를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바지계약에 얽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건설업체들의 미분양 판매는 ‘백약이 무효’다. 업체는 계약자들의 중도금 대출금으로 공사를 이어갈 수 있다. 지난해 이후 주택사업장에 대한 금융권의 추가 PF(프로젝트파이낸싱) 대출은 전면 중단됐다. 공사비가 나올 구석이 없는 것이다.

정확한 수치는 나오지 않지만 지방에선 전체 계약분의 50% 이상이 협력업체 직원 등에 바지계약 형식으로 할당된 경우가 많다고 업계는 추정한다. 대구 D은행 대출담당자는 “최근 한 단지의 계약자 주소를 살펴봤는데 전체 계약자의 80% 이상이 서울에 주소를 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이 아파트를 짓는 건설회사는 본사가 서울에 있다.

최근 진행된 건설사 등급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대기업까지 바지계약에 나서기도 했다. 대형 건설업체인 A사는 지난해 말 협력업체 직원들에게 1인당 100만원씩 계약금을 받고 미분양분에 대한 가계약서를 받았다가 등급평가 후 취소시켰다. 구조조정 대상 평가 항목에 미분양 아파트도 중요한 잣대가 됐기 때문이다.

바지계약자에게 사례비까지 주고 분양권을 넘기는 경우는 주택시장의 침체 현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나중에 더 큰 애물단지가 될 것 같기에 손해가 적을 때 넘기려는 것이다.

지금으로는 해결책이 별로 없다. 경기가 확 좋아지든지, 아니면 금융권의 대출 사정이 나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우려다. 건설산업연구원 두성규 건설경제연구실장은 “지방아파트의 양도세 한시적 면제 조치로는 부족하다”며 “정부는 건설업체 옥석 가리기 작업을 빨리 마무리하고 살아날 건설업체에는 자금 지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함종선 기자

◆바지계약=아파트를 매입할 능력이나 의사가 없는 사람들이 미분양 아파트 또는 분양권을 사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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