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실패한 정치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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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신한국당의 경선에서 이홍구(李洪九)고문이 자진사퇴했다.그의 사퇴는 표면적으로는 8룡(龍)의 싸움에서 역부족을 느끼고 물러선 것이지만,3개월여간의 그 행보를 돌아보면 단순히 한 약세후보의 탈락으로만 볼 수 없는 의미를 가진다.그는 자신의 말대로 정치를 공부하고,정치를 가르치며 30년을 보낸 사람으로서 현실정치에 참여했다.당연히 그의 경선운동은 이러한 배경을 떠날 수 없었던 것 같다.우리 정치의 문제점과 그 개선책을 가르쳐 왔던 사람으로서 그가 펼친 경선운동은 하나의 정치실험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정책과 비전 중심의 운동을 펼쳤다.대통령의 권력집중 문제를 지적하며 책임총리제라는 권력분산 장치를 포함해 비록 관심은 끌지 못했지만 국가구조개편 10대 방안,경제회생 5대 방안,대북식량지원 필요성등 가장 많은 정책대안을 제시했다.특히 세몰이 정치와 지역정서에 의존하는 정치를 거부하며 지구당 방문,대의원 개별접촉을 하지 않겠다고 유일하게 선언한 인물이다.어떻게 보면 가장 바람직한 선거운동을 해온 인물이었다.

그러나 신한국당 8룡의 싸움은 이런 식의 선거운동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물론 인물의 선택이 지도력,인간적 매력,일처리 능력등의 복합적 작용 결과이기 때문에 당내외의 지지에서 그가 뜨지 못한 것을 단지 그런 식의 선거운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당풍토 탓으로 돌리는 것은 단선적 분석일 수 있다.

다만 지금 신한국당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런 식의 운동을 하면 대의원이나 국민이 알아서 밀어주겠거니 계산한 사람이 얼마나 순진했나하는 점이다.경선운동이라는 것이 고작 대표를 사퇴하라,못한다를 놓고 벌인 2개월간의 대결이 전부였다.밖으로는 돈선거를 욕하면서 후보가 빈 손으로 왔다고 뒤에서는 욕을 하며,후보들도 돈을 안쓰는 척하며 한달에 억대 이상을 뿌린다고 한다.TV토론에 나가면 모범답안을 달달 외워서,아니면 재치문답으로 현장 모면에 급급하다.정발협이니 나라회니 하며 패거리 정치로,경상도니 중부권이니 하며 지역정치로 세월을 보낸다.

그를 도왔던 한 참모는 이를 언론의 탓으로 돌렸다.며칠을 두고 고민을 하며 애써 만든 정책은 단 한줄 보도하지 않으면서 누가 누구와 점심을 했다느니,누구와 손을 잡을 것이라는등의 얘기는 대서특필을 한다는 것이다.소위 언론이 선거를 경마(競馬) 중계하는 식으로만 보도하는 탓이라는 것이다.일리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한 후보가 권력분산을 들고 나오면 모두 쫓아 권력분산을 주장하고 인기를 끌만한 정책은 무엇이든 똑같이 다 하겠다고 나서는 상황에서,또 국민들도 신문지면이나 TV토론에서 정책이나 비전을 얘기하면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끼는 현실에서 언론의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중앙일보는 지난 94년부터 국회의원 평가작업을 실시해오고 있다.이 평가에서 최우수의원으로 선정된 20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지난 4.11총선에서 탈락했다.의회활동을 잘한 우수한 의원을 다시 뽑아주는 것이 당연한데 유권자들은 이보다는 지역감정.향응접대.지역구방문등 비합리적인 요소에 아직도 좌우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나라의 정치수준은 그 나라의 국민수준이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국민이 합리적이고 올바르면 자연히 정치수준도 올라간다.지금 신한국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추태는 신한국당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며,네번씩 똑같은 후보를 내는 야당 역시 그 수준의 반영이다.정치를 욕하지만 결국은 우리 국민의 수준도 그 수준이라는 말이다.

이홍구고문은 이런 현실에 대해 “지금은 저 이홍구를 필요로 하는 시간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간접표현으로 사퇴의 변을 밝혔다.일부에서는 그를 놓고“우리 풍토에서 10년 후에나 어울릴 후보”라고 말하기도 한다.그는 현실정치에서 패배했고 그의 정치실험도 실패로 끝났다.아쉬운 것은 그가 다른 후보에 비해 훌륭한 인물이었는데도 후보가 못돼서가 아니라 그의 정치실험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우리 정치의 한계를 새삼 확인한데 있다.우리가 역사의 발전을 믿는다면 그의 희망대로 이번의 시도가 우리 정치에 작은 불씨로 계속 남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문창극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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