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변화바람>사채놀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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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최근 극심한 식량난과 함께 북한사회에 일고 있는 각종 변화의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김정일 정권이 전례없이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고 남북적십자간 대북구호물자 직접전달이 이뤄지고 있으며 영농개혁.농민시장 번성.나진-선봉지구 개방확대등 사회전반에 색다른 기운이 움트고 있다.주체의 단단한 껍질이 균열하기 시작한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본사 통일문화연구소는 최근에 탈북한 귀순자들과의 집중면담을 통해 앞으로 북한 변화의 가능성을 점검할 예정이다. 편집자

북한에서도 사채놀이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식량난이 갈수록 심화되면서 장마당을 중심으로'돈장사'가 번창일로에 있다.

사채거래는 90년대 들어서며 생겨나 이제 중요한'금융관행'이 됐다고 한다.북한이 봉건사회의 전형적 착취수단으로 치부했던 고리대금형 사금융(私金融)이 흐트러진 북한사회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선 것이다.

최근 탈북귀순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사채는 주로 한달 이내 초단기로 제공되고 최소 10%,많으면 30~40%에 달하는 이자가 붙는다.

불과 몇년전만 해도 돈거래를 통해 이자소득을 올리는 것은 상상조차 힘들었다.그러나 요즘 주민들은 돈을 꾸면 이자를 붙여줘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올초 귀순한 유송일(46)씨는“청진은 전국에서 장마당이 가장 발달된 도시라 전문적으로 돈거래하는 돈장사들이 많다”고 밝혔다.

회령에서 인민반장을 오래하다 지난해 12월 탈북귀순한 김명숙(35)씨는“천원 단위를 넘으면 융자기간과 상관없이 20% 내외의 이자가 붙는다”고 말했다.길어도 한달이므로 연이율로 치면 최소한 2백40%가 넘는 엄청난 고리대다.

돈놀이가 성행하는 가장 큰 원인은 북한 공식금융기관인 은행.저금소가 금융기능을 잃은 지 오래기 때문. 지난해말 귀순한 안전원 출신 최영호(31)씨는“은행에 저금된 돈은 돈이 아니다.1만원을 저금하면 다 찾는데 2년이상 걸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채놀이가 명백한 불법인 만큼 금융사고도 끊이지 않고 있다.유송일씨가 밝힌 일화.“청진에서 살 때 군대에서 같이 근무한 여자가 동네 저금소장이 됐다.그는 친구를 통해 은행돈을 꿔달라는 부탁을 받았다.10만원을 빌려주고 열흘만에 3~4만원을 벌었다.외화벌이 하는 다른 여자가 1백만원을 꿔달라고 부탁하자 은행돈과 주위의 돈까지 끌어모아 50만원을 만들어 줬다.돈꿔간 여자가 해삼장사를 하다가 망해 돈을 못받게 돼 결국 검열에 걸려 20년형을 받고 95년초 교화소에 들어갔다.” 채무자들이 불법거래라는 채권자의 약점을 악용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한다.올초 귀순한 김영진(52)씨는“채무자가 오히려'돈이 없어 천천히 주겠다'며 할테면 해보라고 나서기까지 한다”고 밝혔다.

물론 채무자의 가산이 어느 정도인지 먼저 확인하기도 하지만 시비라도 일어나면 채권자가 오히려 불리할 수 밖에 없다.

사채놀이를 하는 계층은 평범한 일반 노동자출신이 대부분이다.돈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쪼개쓰고 저축한 알토란을 조금이라도 불려보겠다는 욕심에서 사채놀이에 손을 대게 된다.현금이 없는 주민들은 돈을 꾸어서라도 장사를 해야 먹거리를 마련할 수 밖에 없다.이런 현실이 사채놀이를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현금동원 능력이 탁월한 고위간부나 화교등'큰손'들은 돈놀이에는 소극적이라고 한다.신분이 노출돼 있는 데다 채무자가 앙심을 품고 당국에 신고할 경우 사태를 수습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당간부들중 일부는 외화벌이 일꾼에게 맡겨 돈을 굴리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 귀순자들의 증언이다.

화교의 자금력은 북한사회에서는 엄청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김영진씨는“평남 문덕군 청남구에는 왕(王)가라는 화교가 살았는데 돈이 얼마나 많은지 은행에서 돈이 떨어지면 그에게서 돈을 융통해 갔다”고 밝혔다.물론 이들도 전문적인 장사꾼들과는 돈거래를 한다.

이제 북한에서 사채놀이는 공적인 금융제도의 획기적 개혁이 없이는 막을 수 없다는 것이 귀순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특히 식량난.외화난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의 현실을 고려하면 앞으로도 장마당을 중심으로 한 사채놀이는 더욱 번져나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김성진.신원태 기자

<사진설명>

북한에서 장마당을 중심으로 장사꾼들이 늘어나고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여유돈을 굴려 이자를 버는 사채놀이가 확산되고 있다.사진은 평남 숙천군에 있는 한 저금소의 한산한 입구.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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