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조원 생돈 더 든다” 보고에 4년 꿈 접은 김승연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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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 오전 김승연(57·사진) 한화그룹 회장은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난 4년간 가슴속 깊이 품었던 ‘대우조선해양의 꿈’을 그는 이날 모두 지워버렸다.

“그럼 실무진 의견을 따르겠다.”

김 회장은 나흘 전인 9일 금춘수 경영기획실장(사장)에게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사실상 포기하겠다는 말을 한 것이다. 이에 앞서 금 사장은 그에게 ‘4조5000억원이 마지노선’이라고 보고했다. 캐시카우라며 끔찍이 아끼던 갤러리아백화점과 서울 장교동 본사 건물까지 팔아야 마련할 수 있는 돈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채권단인 한국산업은행과 맺은 양해각서(MOU)상 한화가 인수가격으로 내야 할 돈은 6조3000억원. 실무진에서는 지금 4조5000억원 이상을 마련하려면 “대우조선해양을 사고 대신 그룹을 통째로 다 내줘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비슷한 시기 한화는 대우조선해양 재무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를 하나 입수해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한화는 최종 계약 전에 실사를 하자고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대우조선해양 노동조합 측의 반대에 부닥쳐 못 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는 “한화가 인수하는 순간 생각보다 더 큰돈을 대우조선해양에 넣어야 할 판이었다”고 말했다. 세계적 금융위기로 해외 선사들이 발뺌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 향후 현금 흐름에 차질이 생길 우려가 크다는 분석 때문이다. 이런 분석은 김 회장에게 직보됐다. 김 회장은 “그룹 전체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한계선을 그어줬다.

산업은행도 한대우 금융4실장(현 기업금융본부장)이 전권을 쥐고 한화를 상대했다. 상호 간 고위층의 어떤 ‘정치적 협상’이 끼어들 수 있는 빈틈이 없었다. “우리도 자기자본비율(BIS)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는 수많은 물밑 협상에서 MOU 문구대로 하자며 한 치의 융통성도 허용하지 않았다. 인수합병은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제3의 인물’ 조언=김 회장과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경기고 동창으로 자주 만났다고 한다. 진 전 장관은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 회장은 귀 기울이지 않았다. 장일형 경영기획실 부사장은 “김 회장이 인수를 즉흥적으로 결정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사실 2006년 이전부터 마음먹었던 일”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오래전에 결심했다는 얘기다. 한화의 속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김 회장이 존경한다는 모 그룹 회장의 조언을 듣고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굳혔다”고 귀띔했다. 친구이기 이전에 반도체 전문가인 진 전 장관의 말을 듣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 회장은 2006년 10월 9일 창립 54주년 기념사에서 “둥지만 지키는 텃새보다 대륙을 횡단하는 철새의 생존 본능을 배워야 한다”며 알듯 모를 듯한 화두를 꺼냈다. 이후 미래의 먹거리 사업을 위한 태스크포스(TF)가 마련됐다. 대우조선해양·하이닉스·대우인터내셔널 등을 검토했다. TF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하이닉스도 검토 대상이었지만 대우조선해양이 최종안으로 만들어졌다”며 “컨설팅업체인 베인 앤드 컴퍼니도 같은 의견을 냈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김 회장은 공식적으로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선언할 수 있었다.

◆또 다른 결단의 순간=김 회장은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 뛰어들 때 상한선과 하한선을 정했다. 상한선이란 ‘현금 흐름상 그룹의 생존이 위협받지 않는 액수(6조3000억원)’다. 하한선이란 매각자인 산업은행이 손해보지 않는 액수(5조3000억원)였다. 하지만 김 회장의 강한 의욕 때문에 한화에 유리한 하한선이 아닌 산업은행에 유리한 상한선으로 결정됐다.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한 때라 우려의 목소리도 컸다.

이후 미국발 금융위기 파장이 커지면서 한화와 의향서까지 교환했던 투자자들이 모두 발뺌했다. 3조원은 자체 조달키로 했으나 1조원도 힘든 상황이었다. 장 부사장은 “융자를 받으려 했지만 감당할 수 없는 10% 이상의 이자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은 고스란히 김 회장에게 보고됐다. 1월 9일 최후의 복안이라며 산업은행에 제시한 분할 매입안을 산은은 “더 발전된 자구책을 내놓으라”며 되돌려 보냈다.

최근 김 회장과 의견을 나눴다는 한 인사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접지 않았던 그가 산업은행의 반응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고 전했다. 김 회장은 대한생명 등을 인수하면서 ‘승부사’라는 별칭이 있었다. 하지만 “인생의 가장 큰 승부수”라고 했던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끝내 접어야 했다. 김 회장은 지난달 31일 일본에서 귀국한 뒤 “대우조선해양 인수 무산 등 지난 일에 신경쓰지 말고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문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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