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적극성 있는 對北정책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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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식량문제를 포함한 북한 관련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방관자의 입장이 아니라 한반도의 주인이라는 뚜렷한 인식을 가지고 문제해결을 위한 국제적 노력을 주도해 나가야 한다.' 지난해 6월3일 필자가 바로 이 칼럼에서 내놓은 제언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정부는 지난 1년동안 4자회담 제의에만 매달리면서 북한동포의 절박한 식량문제에 대해서는 국제적 압력에 못이겨 국제기구의 대북(對北)식량지원에 참여하는 인상을 주었다.그러는 동안 우리는 북한사회에 인풋(input)을 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대북 식량지원에 반대하거나 반대까지는 안해도 소극적인 사람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내세운다.

우선 첫째로 우리가 제공하는 식량이 북한군의 손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그러나 북한군은 우리가 식량을 주지 않더라도 인민이 먹을 식량을 먼저 차지하기 때문에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북한정권이 군사지출을 줄이면 식량을 구입할 수 있는데도 인민을 굶기면서 군비만 계속 확장하고 있다는 점이다.사실이다.그러나 이 문제도 우리가 식량지원을 거부한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북한인민이 굶어 죽어도 북한정권은 군사정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제사회가 북한에 제공한 식량과 북한이 원래 비축하고 있던 식량을 모두 합치면 북한에 대규모 아사(餓死)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북한이 의도적으로 식량 부족량을 과장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그러나 여러가지 증거를 종합해 보았을 때 식량이 부족한 것은 틀림없고 북한당국은 우리가 제공하는 식량원조를 받아들일 자세로 나오고 있다.

문제는 우리의 대북전략에 있다.우리 대북정책의 전략적 목표는 무엇이며,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우리가 추구하는 결과에 대한 일관된 비전이 없으면 일시적 감정이나 도덕적 흥분에 흔들리기 쉽다.특히 반민족적이고 비인간적인 북한 통치자를 생각하면 북한에 식량을 제공할 생각이 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북한 통치자와 도덕적 담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북한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악마의 존재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우리의 동포들을 어떻게 하면 구제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도전이다.

궁극적으로는 북한동포들의 해방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그렇기 때문에 막대한 통일비용 문제에도 불구하고 북한체제는 종식돼야 한다.우리 민족의 화합은 남북체제간의 화합이 아니다.그것은 북한체제의 쇠사슬에서 벗어난 그곳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와의 화합을 뜻한다.그렇다면 대북 식량지원을 거부함으로써 북한의 억압체제 종말을 앞당길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대규모 아사에 직면했던 소련이나 중국의 예를 보아도 식량위기는 체제 몰락으로 연결되지 않았다.도덕적으로도 북한동포의 해방을 위해 북한동포의 희생을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선 무엇보다 인도적 견지에서,그리고 같은 민족의 입장에서 우리는 북한인민을 구원하는 길을 택해야 한다.국제사회의 압력에 못이겨 마지못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적극 나서서 북한주민을 돕기 위한 국제적 노력을 조직하고 주도해야 한다.

이미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우리의 대북정책이 적극성을 보이게 되면 오히려 우리는 북한사회의 변화를 자극하는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북한동포의 의식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고 북한정권에 대남(對南)의존 관계가 조성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식량위기는 개방과 경제논리를 거부하고 있는 북한체제의 당연한 결과인 동시에 어떻게 보면 역사의 신이 남한에 주는 창조적 대북정책의 기회라고도 볼 수 있다.더 이상 국내여론을 지나치게 의식해 대북정책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오히려 국민은 지도자가 옳은 일을 꾸준히 밀고 나갈 때 마음 속으로부터 이해와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김경원 사회과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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