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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액권시대]'화폐지존' 신사임당, 세종대왕 밀어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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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화폐만큼 시대와 역사를 반영하는 것도 흔치 않다. 조개껍데기에서 시작해 귀금속과
지폐, 전자화폐로 변신해 온 화폐의 발전 과정은 그대로 인류 문명의 발달사를 대변한다. 정치·경제·문화를 포괄하는 상징성과 어디서든 누구나 사용한다는 보편성도 함께 갖고 있다. 새로운 화폐, 특히 고액권의 등장이 항상 ‘뜨거운 감자’가 돼 온 이유다.
이르면 5월, 5만원권이 나온다. 고액권의 모든 것을 한자리에 담아 봤다.


505년 만에 그가 다시 태어난다. 1504년 강릉 오죽헌에서 첫울음을 터트렸던 그가 대한민국 최고액권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대전 유성구에 있는 한국조폐공사 화폐디자인조각실에서 마무리 몸단장을 하고 있다. 지존의 자리에서 1만원권을 끌어내릴 5만원권 지폐의 주인공 신사임당 얘기다. 한국은행은 이번 달 최종 도안을 공개하고, 이르면 5월 시중에 이 돈을 공급할 예정이다.

5만원권은 한국 화폐사에서 가장 액수가 큰 지폐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고액권은 기껏해야 1000환, 1000원이 고작이었다. 모든 게 부족했던 시절 굳이 액수가 큰 돈을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경제 규모에 비례해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서 73년 1만원권이 등장했다. 또다시 36년이 흐른 지금 국내총생산(GDP)은 약 150배가 됐고 물가는 12배 올랐다. 10여 년간의 논란 끝에 새로운 고액권이 등장하게 된 이유다.

5만원권 가상 이미지

최고액권의 자태는 세계적 추세를 그대로 따른다. 작고 밝고 쉽게다. 세로는 1만원권과 같지만 가로는 6㎜ 길다. 지갑에 넣고 빼는 실용성을 존중하면서도 누구나 쉽게 구분할 수 있게 한 디자인이다. 1000원권과 5000원권·1만원권에도 똑같은 규칙이 적용된다. 색깔은 밝은 황색, 차분하면서도 화사하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사임당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발행 준비는 순조롭다. 한국은행은 “최종 도안이 확정된 뒤 3~4개월의 인쇄 기간을 거쳐 새 돈을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한은의 발주량에 따라 달라지지만 올해 발행량은 4억4000만 장가량이 될 것으로 조폐공사는 예상했다.

새로 나올 5만원권은 한국 화폐사를 새로 쓰게 된다. 사임당은 대한민국 화폐에 등장하는 첫 실존 여성이다. 62년 ‘저축을 하는 모자상’이 100환권에 새겨진 적이 있었지만 가상의 인물이었다. 이(李)씨가 아닌 인물로 처음 등장하는 기록도 세우게 된다. 지금 쓰이는 화폐는 이순신(100원 동전), 이황(1000원권), 이이(5000원권), 세종대왕(이도1만원권) 등 모두 이씨다. 가짜를 만들어 내기 극히 어려운 최첨단 위조 방지 장치도 새롭게 추가된다.

화폐는 그 나라 역사와 문화를 오롯이 드러낸다. 새로운 돈이 나올 때마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는 이유다. 순탄치 않았던 사임당의 생애처럼 5만원권 지폐도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90년대부터 10여 년에 걸쳐 발행 필요성을 놓고 갑론을박이 팽팽했다. 찬성론자는 해마다 3000억원 안팎에 이르는 자기앞수표 발행과 관리 비용을 아낄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대론자는 뇌물과 부정부패의 오랜 악습이 다시 활개를 칠 것을 경계했다.

거액을 은밀히 주고받을 때 '차떼기'가 '봉투떼기'만으로 충분해질 것이라는 우려다. 실용성도 논란이 됐다. 신용카드 사용이 보편화되고 현금 사용이 줄어들고 있는 마당에 굳이 새로운 고액권이 필요하냐는 반론이 잇따랐다. 97년 91조원이던 10만원권 수표 발행액은 2005년 69조2690억원으로 크게 줄었다. 주인공이 왜 사임당이냐는 불만도 일부 여성계를 중심으로 제기됐다. 부모와 남편과 아들을 섬기는 ‘현모양처’ 이미지를 한국 최고액권의 상징으로 삼는 건 21세기엔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었다.

인물 선정에 관계하는 한국은행 고위 관계자가 신사임당이 시집간 덕수 이씨 가문이라는 웃지 못할 음모론까지 제기됐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확정된 도안이지만 보수 색채가 강한 이명박 정부 때 발행된다는 점이 이 같은 논란을 부채질했다.사실 새로운 화폐는 모두 이 같은 정치적 의심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50년 한은이 설립되고 처음 발행된 지폐엔 당시 대통령인 이승만의 얼굴이 실려 있었다. 아직까지도 생존 인물로는 유일하게 화폐에 얼굴을 남긴 사례로 남아 있다.

집권자의 얼굴을 화폐에 새기는 것은 고대로부터의 관습이지만 현대에 들어서선 왕이나 독재자를 둔 일부 국가를 빼곤 거의 하지 않는 일이다. 4·19혁명이 일어난 뒤 이 전 대통령이 지폐에서 사라지고 세종대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 환을 원으로 바꾸는 긴급 통화조치를 한 62년 이후엔 남대문·독립문·거북선 등 문화유산이 등장했다가 70년대 지금의 화폐 체계가 자리 잡으면서 역사 인물들이 전면에 나섰다. 박정희 정부가 ‘성웅’으로 떠받들던 이순신 장군이 처음 얼굴을 내민 시기이기도 하다.

당초 함께 발행될 예정이었던 10만원권이 공수표가 된 데도 이 같은 사정이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 발행 여부를 결정하는 금융통화위원회는 지난달 23일 기획재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10만원권 발행을 무기한 연기하기로 했다. 말이 좋아 연기지 사실상 중단이다. 김구 선생이 주인공으로 정해지자 보수단체의 반발이 잇따랐다. ‘10만원권은 이승만, 5만원권은 박정희를 써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기획재정부는 “고액권의 필요성이 크게 줄었고, 인플레이션 우려가 있다”는 점을 공식적 이유로 내세웠지만 “말 못 할 사정들이 있다”는 점도 부인하지 않고 있다.

좋든 싫든 5만원권은 국민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주게 된다. 화폐의 단위를 아예 낮추는 리디노미네이션만큼은 아니라 해도 심리적 인플레를 부추길 수 있다. 화폐 발행액의 90%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해 왔던 ‘배춧잎’의 위상이 지금의 5000원권 자리로 떨어질 수 있다. 은행들은 현금지급기를 통째로 바꿔야 할 판이라고 걱정하는 반면 이 기계를 만드는 회사의 주가는 특수에 대한 기대로 상한가를 달린다. 일반인도 빳빳한 5만원짜리를 만지는 흐뭇함 대신 두툼한 지갑이 주는 안도감을 양보해야 할 것이다. 물가 걱정을 시키지 않으면서도 경제를 활성화하는 국가경제의 ‘효녀’ 역할, 이것이 5만원권에 주어진 숙제다.

나현철·고란 기자 tigera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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