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가장위기의가정>2. 여성취업 늘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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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돈쓰는 재주밖에 없는 주제에….” 어렵게 돈 얘기를 꺼낼 때마다 남편이 내뱉는 한마디에 주부 김모(38)씨는 가슴에 못이 박히곤 한다.대학 졸업후 다니던 직장을 결혼과 함께'당연히'그만둔 김씨였다.“뭐 대단한 일을 한다고 그러느냐”며 살림이나 잘 하라던 남편이 요즘엔“아무개 부인은 돈만 척척 잘 벌어온다”며 돌변한 것이 얄밉기만 하다.물론 애들이 커가며 눈덩이처럼 불어난 생활비를 대느라 남편도 숨이 턱에 찬걸 김씨는 안다.하지만 무슨 일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몇차례 주부사원 모집 광고에 혹해서 찾아갔다가 물건 팔란 얘기에 겁이 나 돌아서기 일쑤였다.

김씨처럼'돈 한푼 못버는'전업주부들이 죄인 취급당하는 세상이다.물가는 뛰는데 남편 월급봉투는 그만큼 두둑해지지 못했다.국민소득 1만달러 국가에 걸맞게(?) 높아진 소비수준은 줄이는게 사실상 불가능하다.경영합리화를 외치는 기업들은 하늘처럼 믿고 산 가장들을 졸지에 실업자로 전락시킨다.

이쯤 되면 가정경제를 지탱키 위해 여자도 함께 돈벌이에 나서야 한다는 결론에 자연스레 다다른다.실제로 혼자 벌어 못산다는 공감대가 확산되며 일자리를 갖는 여성들의 숫자는 증가추세다.특히 30~54세 여성들의 경제활동참가율이 꾸준히 는 것은(90년 57.5%→95년 57.6%→96년 58.4%) 주부들이 일에 뛰어드는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같은 취업여성 숫자도 다른 나라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구미는 말할 것 없고 이웃 일본이나 싱가포르보다 뒤처져있다.전통적인 가부장제가 그 주범이다.〈그래프 참조〉'여자는 집안일이나 하라'며 남성 중심 사회를 유지해온 결과 오늘날 혼자서 식구들을 먹여살리느라 헉헉대는 위기를 자초한 것이다.“뒤늦게 해결책으로 여자들을 일터에 내보내려 하지만 이미 모든게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구조가 이를 가로막고 있다”는게 이수자(李秀子.성신여대대학원강사.사회학박사)씨의 진단이다.

우선 여성들을 고용하는 기업체들의 관행부터 가부장주의에 젖어있다.남녀고용평등법 제정후 여성취업을 가로막는 법제도는 대부분 고쳐진 것으로 평가된다.그러나 현실과 법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다.1백대 기업만 해도 전체 대졸사원의 7.5%만이 여자다(한국여성개발원 조사).다양한'신인사제도'들은 여성을 승진.교육기회가 한정된 직종에만 머무르게 한다.

H유통업체 5년차인 송모(29)씨의 경우를 보자.대졸 여직원인 송씨는

관리능력을 키우는 남직원 교육대신 인사예절을 가르치는 고졸 여직원

교육에만 참여해왔다.항의해봤으나 여직원에게 관리교육을 시킨 전례가

없다는게 회사측 설명.게다가'기혼 여직원은 전원 계약직으로 전환시킨다'는

신인사제도가 최근 도입돼 송씨는 승진하려면 결혼조차 포기해야할

입장이다.

기업들이 한결같이 내세우는 여직원 차별의 이유는'애낳고 키우며 집안일도

하는 여자들은 회사일에 전념할 수 없다'는 것.결국 남녀가 함께 일할 수 있게

가정과 사회구조가 갖춰지지못한 책임을 여성들만 오롯이 지고있는 셈이다.

따라서 여성들을 일하게 하려면 먼저 가부장제 사회가'여자일'로만 떠맡긴

부담부터 사회가 나눠지어야 한다는게 여성계 주장이다.우선 1인당

1백50만원 이상 드는 여직원의 출산휴가 비용부터 분담해야 한다.기혼여성

채용을 기피하는 기업체들의 주된 변명이 출산휴가를 포함한 이른바

'모성보호'비용이다.

맞벌이부부의 5세이하 자녀중 4분의3 이상이 탁아시설 혜택을 못받는 것도

큰 문제다.단지 시설수를 늘리기보단 막대한 탁아비용 부담을 줄여주기위해

영국.프랑스처럼 유아교육을 공교육화하는게 필수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취업여성의 발목을 잡는 과도한 집안일도 가족들이 함께 해주지않으면

안된다.“집안에서 어머니.아내 역할의 비중을 줄여주지 않는한 여성취업

확대는 빈말로 그치게 될뿐”이라고 박숙자(朴淑子) 국회여성특위위원은

강조한다.

이처럼 오랜 관습을 깨치기 위해선 여성취업이 집안일을 벗어나 사회전체의

문제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딸.아들간에 교육 차별은 사라진 지금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절반이하(96년 48.7%)를 맴돈다면 그만큼

막대한 교육비용이 낭비되는 셈이다.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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