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보다 살인에서 쾌락 … “국내선 보기 드문 성적 살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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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미국에서 테드 번디라는 시애틀대 법대생이 연쇄살인 혐의로 체포된다. 그는 10여 개 주에서 30여 명의 여성을 성폭행·살해했다. 그는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말솜씨로 여성을 유인해 차에 태웠다. 그가 타고 다닌 차 위에는 언제나 보트가 실려 있었다. 부를 자랑한 것이다. 번디는 89년 전기의자에서 생을 마감했다. 번디 사건은 ‘성적 살인(Sexual Homicide)’의 전형이다. 서구에서 성적 살인은 연쇄살인의 대표적 유형이다. 뛰어난 외모와 말솜씨, 그리고 고급 승용차를 활용한 강호순(38)의 ‘연쇄 성적 살인’은 테드 번디를 닮았다. 경기대 이수정(범죄심리학) 교수와 경찰대 표창원(행정학과) 교수는 “한국에서 지금껏 발견되지 않은 순수한 형태의 성적 살인의 등장”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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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살인=강은 반드시 성폭행 후 살인을 했다. 표 교수는 이를 “성적 살인의 대표적 특징인 중독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살인을 통해 일상생활에서는 맛볼 수 없는 쾌락을 맛보고, 여기에 중독돼 갔다는 것이다.

이번 수사 과정에 참여했던 이수정 교수는 강호순의 관음증과 페티시즘에 주목했다. 강은 긴 머리에 스타킹과 부츠를 착용한 여성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한 차례(넥타이)를 제외하고는 스타킹(타이즈 포함)으로 목을 졸라 살해했다. 뉴욕시립대 퀸스칼리지의 헤럴드 셰터 교수도 저서 『연쇄살인범 파일』에서 성적 살인의 대표적 특성으로 ‘페티시즘과 관음증’을 들었다.

‘심리적으로 가장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 연말연시에 범행이 저질러졌다’는 것도 성적 살인의 특징을 드러내는 점이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연쇄살인을 ‘세 건 이상의 살인, 서로 다른 장소에서 살인,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냉각기 존재’로 정의한다. 강호순은 반드시 냉각기를 뒀다. 성적 살인범은 ‘성폭행이 아닌 살인에서 쾌락을 느낀다’는 점에서 강간치사범과는 구별된다. 성적 살인범에게 강간은 살인에 이르기 위한 단계일 뿐이다. 동기는 없다.

◆자신만의 ‘살인의 색깔’=운동선수들에겐 징크스가 있다. 특정 부위의 스트레칭을 반드시 해야 경기에 임할 수 있다든지 하는 ‘자신만의 단계’가 있다. 성폭행을 하고, 스타킹으로 목을 조른 뒤 땅에 묻는 ‘공통된 단계’를 반복한 범인도 마찬가지다. 이를 표 교수는 ‘연쇄살인범의 의식(ritual)’으로 설명했다.

강호순은 ‘완벽한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상황’을 고려해 치밀하게 움직였다. 동국대 곽대경(경찰행정학) 교수는 “범행 시간과 장소·대상 등 모든 면에서 범인은 자신에게 완벽한 환경을 구상하고 움직였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도 “대부분의 피해 여성이 1m50~60㎝의 키에 몸무게 50㎏ 안팎이었다.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를 고른 것”이라고 했다.

강의 정신감정을 맡은 서울아산병원 정석훈 정신과 전문의는 “부인이 죽어 충격을 받아 살인을 저질렀다는 말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높다. 경찰에게 ‘증거를 대보라’고 말할 정도로 죄의식이 없다. 반사회적 인격장애(사이코패스)로 보인다”고 결론지었다.

범인의 이웃 주민은 “인사성이 밝았다. 배추를 옮길 일이 있으면 직접 차를 몰고 날라 주기도 했다”고 전했다. 정 전문의는 “사이코패스는 정신병이 아니어서, 겉으로 볼 때는 일반인과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더 이성적이고 선량해 보인다”고 설명했다. 
강인식·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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