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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스위스은행등 예치 '해외 검은 돈' 유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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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정말 연 5%의 이자로 수천만달러를 쓸 수 있습니까.” 모기업 자금담당 임원 K씨의 이런 질문에 외국계 금융회사 국내 사무소장 L씨는 예상했다는듯 이미 수천만달러 대출이 나간 모 그룹과의 대출계약서를 보여줬다.

L씨는“대신 지급보증을 포함한 법률적인 문제는 그쪽에서 확실히 해주셔야 합니다”고 덧붙인다.

며칠후 양측은'제3국 기업이 K씨 회사 지분 일부를 수백만달러에 인수한다'는 계약을 했고,한달여가 지난뒤 K씨 회사는 3국 기업이 보내온'주식 매각자금'을 전달받았다.

거대한 외국 자금이 편법으로 국내기업에 대출되는 현장이다.

금융계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외국돈은 크게 유대계.아랍계.화교계.일본계등 네가지. 이 돈은 일부 외국금융기관 한국사무소등을 통해 국내기업에 중개.알선되고 있다.

대출금리는 수수료 포함,5% 안팎. 은행 우대금리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것은 물론 국제금리인 런던은행간금리(LIBOR)보다 낮은 수준이다.국내 대기업들의 해외 자금조달 비용이 6%이상이고,더욱이 대부분의 기업들은 직접조달 능력이 없는 점을 감안할 때 아주 좋은 조건이다.

이런 돈은 대부분 외국 전주가 국내 해당기업의 주식을 사거나 합작투자하는 방식으로 들어오고 있다.더욱이 지난 2월부터 주식취득을 통한 외국인의 직접투자가 적대적 기업인수.합병(M&A)을 제외하고는 완전 자유화돼 자금유입이 더욱 쉬워졌다.외국인 투자인가를 받아 일정 한도내에서 지분취득할 경우 외국환은행 신고만으로 가능한데 외국의 검은 돈이 이 과정에서의 허점을 이용해 국내로 들어온다.

표면적으로는 투자 형태를 갖추면서 실제로는'일정기간 후에 미리 약정한 이자를 덧붙인 값에 주식을 되산다'는 내용의 이면계약을 미리 돈 주인과 체결한다.형식은'지분투자'지만 실제로는'차관거래'인 셈이다.

또 유령회사를 만들어 이들에게 신주를 인수시키는'제3자 배정 유상증자' 수단이 동원되기도 하며 역외펀드 설립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분을 취득하는 방법이 사용되기도 한다.

최근 이런 자금을 굴려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는 한 금융기관 관계자는“나에게 제시된 자금만도 10억달러나 됐다”면서“이런 돈이 적게는 수백만달러에서 최고 억달러 단위로 쪼개져 주로 대기업에 대출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자가 낮은 것은 대부분 스위스은행 등에 예치중인'검은 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금주 입장에선 이자없이 스위스 은행에 묵혀두는 것보다는 이익이고,국내 기업으로선 싼 돈을 쓰게되니 서로가 좋은 셈이다.게다가 돈 세탁수단으로 동원되기도 한다.

이런 돈은 누구를 통해,얼마나 들어왔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랍계 자금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저명인사를 통해 국내로 들어오고 있으며,화교계 자본은 회현동 일대 중개소를 중심으로 컴퓨터.섬유업계로 많이 대출되고 있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외국인 주식투자자금(올 1~5월중 62억달러)이나 외국인 직접투자(1~4월중 36억달러)중에도 이런 돈이 적지않게 섞여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외국의 지하자금이 국내 산업자금으로 쓰이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김원태(金元泰)한국은행 자금담당이사는“탈법여부는 논외로 치더라도 핫머니와 마찬가지로 통화교란 요인이 될 수 있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국내 경제 여건이 악화될 경우 이런 편법 현금차관이 일시에 빠져나가 외환위기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한편 관계당국은 최근 모 대기업이 이런 방식으로 거액을 조달한 혐의를 잡고 조사에 착수하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효준.박장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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