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세상보기>왜 아무것도 되는 게 없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서울과 부산을 한나절권으로 묶겠다던 경부고속철도 공사가 백지화 위기에 놓이게 됐다.빅뱅에 버금가리라던 금융개혁은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스몰뱅의 근처에도 못 가는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의 밥그릇 싸움으로 전락했다.교육개혁은 과외추방이 목표인지 과외조장이 목표인지 알쏭달쏭한 결과를 낳고 있다.

철저한 진상규명으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자던 한보비리 조사는 몇몇 깃털들의 농간으로 낙착됐다.대선자금 유용과 국정문란을 응징해야 한다던 현철(賢哲)비리는 시시한 탈세사건으로 결말났다.페어 플레이의 모범을 보이자던 신한국당 경선은 이전투구(泥田鬪狗)로 변질되고 있다.

왜 이렇게 하는 일마다 안 되고,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고,안 되는 일만 하려 할까.이것이 개인의 팔자인지 나라의 운수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이 요즘의 한탄이다.

“매염봉우(賣鹽逢雨)라,소금을 팔려는데 비를 만나는 격으로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습니까.혹시 우리나라에 마(魔)가 낀 것 아닙니까.”“이 세상에 운(運)은 없습니다.좋은 운이라고 하는 것은 알고 보면 선견(先見)에 대한 보상이고 나쁜 운은 단견(短見)에 대한 형벌일 뿐입니다.”“그런 근사한 말을 누가 했소.”“프랑스의 계몽철학자 볼테르의 말입니다.”“볼테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1987년 작품'아무 것도 되는 게 없어'(Why Nothing Works)에 보면 주유소 옆에서 벌어지는 총격전,몇주일 걸려 배달되는 편지,움직이지 않는 지퍼,구입한 적이 없는 물건값을 청구하는 컴퓨터,고생길의 비행기 탑승,방사능이 새는 원자로 등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미국인들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부조리를 한껏 나열한 이 책에서 해리스는 일이 잘못 돌아가는 원인을 이런 요지로 진단한다.

-단일한 인과관계에서 생기는 변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사회변화의 양상은 고리가 아니라 거미줄과 같다.수많은 거미줄가닥이 우연히 교차하고 또 역교차하면서 우리 자신을 붙잡아 놓는다.보다 나은 세계를 모색하려고 꿈틀거릴수록 이 거미줄은 우리를 조여 온다.

이 책을 읽은 소설가 김형경의 감상문은 이렇다.

-아무 것도 되는 게 없으니 그래 어쩌란 말이냐고 되묻는 것은 혼돈에 빠진 15년전의 미국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바로 이런 혼돈이 우리의 현실이고 미래라는 생각이 든다.

유감스럽지만 그 감상은 옳은 것 같다.

무너지는 백화점,끊어지는 다리,폭발하는 가스관,불나는 지하철,돌아오지 않는 개구리소년,사람을 때려 죽이는 운동권 대학생 등이 오늘의 현실 아닌가.최신의 혼돈은 무엇일까.'촌지목록을 작성하는 꼼꼼한 여선생님'이 단연 압권일 듯. 일이 안 되고 꼬이는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작업이 드디어 최근 학술연구 대상의 총아가 됐다.이름하여 복잡계(複雜系) 연구.기존 과학의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연구한다는 이 학문도 해리스와 비슷한 가설을 제시한다.

-경제위기나 정치부패 같은 현상을 하나의 틀로 보면 안된다.이런 것은 여러 요소들이 결합해 일어난 현상이며,부침을 거듭하며 자기조직화해 나간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설명한 복잡계 현상은 흥미롭다.

-복잡한 해결책을 동원해 문제를 풀려 하지만 실마리가 무엇인지 스스로 모르게 되고,그 해결책조차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는 상황.

김성호 수석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