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기행>'그들도 우리처럼' 정석군 사북.고한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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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한많은 사연들이 탄가루에 묻혀있다.언덕빼기에 축사같은 집들이 늘어선 사택촌,인적이 끊긴 시커먼 나무판잣집.두더지처럼 땅만 파다 내팽겨쳐진 광원들의 한이 배어난다.

60년대초 탄광지대로 출발한 사북.고한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안고 각지에서 몰려든 광원들이 한때 금맥을 캐던 곳이다.풍요로운 내일을 지하막장에 담보한채 저임금.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사랑과 꿈을 버리지 못하던 곳.인간답게 살아보겠다는 광원들의 욕구가 사북사태로 폭발,한국노동운동사에 한획을 그었지만 이젠 시간이 멈춰버린 곳이다. 80년대말 각각 2만명이 넘었던 고한.사북의 인구는 현재 각각 8천,9천여명.탄광이래야 고한의 삼척탄좌,사북의 동원탄좌 단 두곳으로 그나마 이들도 2~3년내 문을 닫아야 할 지경이다.

80년대 잇따른 폐광의 후유증이 완연한 이 곳.고한 저탄장 맞은편 중앙교회 담에 칠해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풍의 벽화는 광원들의 처절했던 삶을 노래한다.삼척탄좌를 지나 정암사.만항재로 이어지는 등산코스는 탄가루로 범벅됐던 광원들의 숨통이었다.

80년대 탄광지대를 그린'그들도 우리처럼'(90년11월 개봉,박광수감독,동아수출공사제작)은 운동권출신 지식인과 다방레지의 사랑을 묘사한 영화다.

온통 검은색과 흰색으로 수놓은 탄광촌의 겨울.방황과 혼돈의 80년대를 산 한 남자가 김기영(문성근)이란 가명으로 찾아든다.그는 광원이 되길 원하지만 간신히 연탄공장 잡역부로 취직,수배로 지친 몸을 숨긴다.

그는 이곳에서 연탄공장 사장의 외아들인 패륜아 이성철(박중훈)과 탄광촌 다방에서 자신의 몸을 티켓으로 팔아 살아가는 송영숙(심혜진)을 만나면서 운명이 바뀌게 된다.영숙이는 기영에게 진실한 사랑을 느끼면서 성철에게 티켓판매를 거부하게 된다.그러자 성철은 그녀를 폭행하고 이에 기영이 대항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 기영은 수배자임이 밝혀져 경찰에 쫓기고… 영숙이 여관에 마지막 차배달을 갔다 성철을 만나 그를 칼로 찔러 체포되면서 이들의 사랑은 미완성으로 끝난다.

결국 기영 혼자 역에서 기차를 타는 것으로 결말이 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지칠줄 모르는 희망을 담고있다.

“우리들이 오늘을 무어라 부르던간에/이미 변화는 시작됐다./사라져야 할 것은 오늘의 어둠에 절망하지만/보다 찬란한 내일을 사는 사람들은/오늘의 어둠을 희망이라 부른다.” 94년말 핵폐기물 처리장 수용을 제안했고 지금은 카지노 유치에 목을 맬 정도로 절박한 이 곳.카지노는 빠르면 99년 문을 연다지만 그동안을 견디기 힘들 정도다.지난 3월에는 주민 2천여명이 모여'탄광지역 종합개발계획'조기착공을 촉구하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고한.사북은 여름이 시원한 고원지대.또한 광원들의 애환이 곳곳에 배어있는 역사문화여행지이기도 하다. 고한.사북=송명석 기자

<사진설명>

숙명처럼 등허리에 땀을 지고 살아온 땅 고한(古汗).태백준봉의 천년노송,그들도 우리처럼 허리가 휘었는가.꺾인 세월속에서도 새순이 돋은 소나무는 이 지역 광부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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